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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학파와 ≪하곡집(霞谷集)≫ [김형우]

윤여설 2008. 5. 15. 14:11
 
강화학파와 ≪하곡집(霞谷集)≫ [김형우]
하곡 정제두(鄭齊斗)가 강화도의 하곡 마을에 자리를 잡은 것은 1709년 8월의 일이다. 붕당정치가 절정에 달했던 숙종 때로, 그는 정권유지를 위해 공허한 논쟁을 일삼던 정치상황과 경직된 학문 풍토를 비판하며 선산(先山)이 있는 강화도 들어와 20년을 살았다. 학문을 출세의 수단으로 삼는 주자학 일색의 허학(虛學)을 버리고, 우리의 시각에서 현실의 문제를 실천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는 양명학을 바탕으로 하되 그것만을 고집하지 않았으며, 열린 학문자세에서 인간과 사회를 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한 대학자였다.
[정제두묘(인천시기념물 제56호)]

정제두가 강화도로 들어오자 그의 학문과 인품을 흠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따라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학맥은 200여 년 동안 이어져 이른바 ‘강화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원교 이광사(李匡師)는 1732년(영조8) 강화도로 정제두를 찾아가 ‘실심실리(實心實理)’를 배웠다. 몇 해 후에 온 가족을 이끌고 아예 강화도로 들어가 살면서 더욱 깊은 공부를 하고자 했으나, 갑곶나루에 이르렀을 때 정제두의 부음을 들어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이영익이 정제두의 손녀딸과 혼인하여 두 가문은 사돈관계가 되었다. 동국진체의 계보였던 그의 스승 백하 윤순(尹淳)도 정제두의 문인이었으며, 정제두의 아우 정제태의 사위였으므로 동국진체와 강화도는 연관이 깊다 하겠다.
완구 신대우(申大羽)도 정제두의 손자사위가 되어 강화도 하곡 옆 마을에 살면서 학문을 이어 받았고, 그의 아들 석천 신작(申綽)에게 전하여 주었다. 정약용과 교분이 두터웠던 신작은 양명학을 공부한 후 실학으로 이를 절충하였으며 경학과 노장학에도 밝았던 당대의 뛰어난 학자였다.
정제두의 학문과 정신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 지어 양명학에 바탕한 객관적 역사관을 수립했고, 이면백의 ≪해동돈사≫, 이건창의 ≪당의통략≫으로 그 정신이 계승되었다. 사기 이시원(李是遠)은 병인양요 후 자결하는 절의정신을 보였고, 영재 이건창(李建昌)은 당대의 가장 냉철한 지식인이었다. 근대 민족주의 학자 위당 정인보(鄭寅普)는 난곡 이건방(李建芳)의 제자이다. 이처럼 경학과 문학, 역사, 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이 이룬 강화학파의 선두에 하곡 정제두가 있다.
[이건창 생가(인천시기념물 제30호)]

강화학파의 비조인 정제두는 포은 정몽주의 후손이요, 우의정을 지낸 정유성의 손자로 명문가문 출신이다. 학문적으로도 탁월한 연구 성과를 낸 대학자였고, 세자의 스승으로 일하는 등 왕실과의 관련도 매우 깊었다. 그러나 그가 지은 수많은 글들은 책으로 간행되지 못했다. 필사본으로 사장(私藏)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그의 학문이 양명학에 바탕을 둔 때문이었다.
주자학 유일 사상이었던 조선 후기에 양명학을 공부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었었다. 주자의 해석과 달리 유교 경전을 해석하면 이단으로 몰렸고, 공개적으로 양명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사림사회에서의 행세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유가 사상의 중세적 해석인 주자학보다는 근세적 해석인 양명학이 당시의 현실 사회에서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자들은 경직된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강화학이 강화도라는 한정된 지역에서 가학(家學)의 형태로 계승된 이유가 여기에 있고, 하곡집이 간행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하곡집(霞谷集), 필사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하곡집≫의 필사본은 현재 4 종류가 전해온다. <22책본>과 <10책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있고, <11책본>과 <8책본>이 서울대학교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밖에도 이능화 선생이 보았다는 <40여책본>과 조선사편수회의 지방사료차입목록에 실려있는 <32책본>, 그리고 신대우의 수집본인 <35책본> 등 여러 종류의 필사본이 기록에 보이지만 그 소재를 알 수가 없어 안타깝다.

≪하곡집≫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준엄한 지식인의 자세를 견지하면서, 인간의 본질과 민족의 문제에 대하여 가장 실천적으로 고민하였던 정제두의 학문과 정신이 담겨있는 문집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 때문에 인쇄본으로 간행되지 못한 채 필사본만 여기저기 흩어진 미정고(未定稿)로 전해오고 있는 실정이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22책본>을 저본으로 하여 ≪국역하곡집≫ 2권을 1973년에 발간하였고, 원문은 한국문집총간 ≪하곡집≫으로 영인 출판되었다. 이제는 누구나 손쉽게 정제두의 문집을 접할 수 있게 되었으니 크게 다행한 일이다.
현존본 가운데에서는 이 <22책본>의 내용이 가장 풍부하다. 하지만 그 자체에 결본도 있고 여기에는 수록되지 않은 글이 다른 본에 있는 것도 있어 역시 미정고 필사본이다. 이 <22책본>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사람이 가져갔던 것을 해방 후 문화재반환 때에 도로 찾아온 것이라고 한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필사본을 찾는 노력을 국내외적으로 기울여 정제두의 글이 모두 집대성되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대해본다.

▶ 문화재청 인천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김형우 감정위원

 

 

 <문화재청에서 옮겨 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