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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도 혹시 이렇게 생각하고 계신건 아니신지요? 그렇다면 지금부터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궁녀의 정체를 정보통신부 국가지식정보자원관리 사업으로 구축된 ‘한국여성사 지식정보시스템(http://www.womenshistory.re.kr:7070) '에서 밝혀보도록 합시다.
▶ 궁녀, 그들은 누구인가?
궁녀란 궁중여관의 별칭으로 궁중에서 일하는 여성관리라는 뜻입니다. 좁게는 상궁, 내인, 생각시를 말하고 넓게는 각 처소 및 상궁 개인에 소속된 무수리나 방자 같은 하녀들까지 포함됩니다.
13세 미만의 어린 나이에 궁궐에 들어와 왕족외엔 궁궐에서 죽을 수 없다는 궁궐법도로 나이 들어 병이 들어야만 궁궐에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예외적으로 가뭄이 들면 궁궐 밖으로 나가 살기도 하였습니다. 중앙 정부 문, 무반이 5천명을 넘지 않았던 조선후기에 궁녀의 수는 500여명에 달했습니다.
▶ 궁녀의 선발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거나 왕의 여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궁녀 선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이와 처녀성 이었습니다. 궁녀가 소속될 부서마다 그 나이가 달랐는데, 왕의 여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밀(지극히 은밀하고 비밀스럽다는 뜻에서, 임금이 늘 거처하던 곳을 이르던 말)은 4~5세부터, 침방(궁중에서 바느질 하던 곳)과 수방(수놓는 일을 맡아보던 곳)은 7~8세, 그 외 부서는 13세 미만으로 뽑았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관청의 여자 종이나 기생의 자녀가 궁녀로 선발되기도 하였으나, 점차 양가집의 규수들이 궁궐로 선발돼 들어가는 경우가 허다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민간에서는 궁녀를 피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 일찍 결혼하는 풍습과 같은 폐단이 생겨 영조는 양가의 딸을 궁녀로 뽑지 못하게 법으로 문서화 하여 명백히 하기도 했습니다.
섣달그믐에는 “쥐부리 글려”라는 불놀이 비슷한 행사를 합니다. 그 해에 입궁한 어린 궁녀들에게 밀떡을 물린 다음 그 위에 수건을 접어 양쪽에 삼실로 끈을 달아 마스크같이 귀에 걸게 합니다. 그리고 어둠이 내리면 대궐 뜰에 길게 한 줄로 세워두고 수십명의 젊은 내시들이 긴 바지랑대 끝에 횃불을 붙이고 다가와 입을 지지는 시늉을 하여 “쥐부리 글려. 쥐부리 지져”라며 위협했습니다. 새로 입궁한 어린 궁녀들에게 말조심을 일깨우기 위함과 동시에 잡귀를 몰아내고자 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이때 왕비 이하 선배 궁녀들은 먼 발치에서 구경을 했다고 합니다.
▶ 궁녀의 부서 및 업무
입궁 후 궁녀가 소속되는 부서의 결정, 즉 그들의 운명은 얼굴이나 몸매, 맵시가 아닌 손모양에 달려 있었습니다. 일단 소속 부서에 배치되면 수년에 걸친 도제식 현장 실습 교육을 받게 되기에 공식 교육기관을 통하지 않더라도 관련 분야에서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통상 지밀(至密), 침방(針房), 수방(繡房), 세수간(洗手間), 생과방(生菓房), 소주방(燒廚房), 세답방(洗踏房) 등 7개 부서에서 각각 다음과 같은 업무를 수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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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녀의 생활
대부분의 궁녀들은 격일제 근무를 했으며 업무 관련 교육 이외에 궁중 법도 및 기초 교양 교육이 있었습니다. 특히 한글 연습은 장기간 계속되는데 문안 편지에 쓴 필체가 일정하여 궁체(宮體)라는 하나의 장르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궁녀들이 받았던 엄격한 교육과 통제된 생활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장래 왕의 후궁이 될지도 모르는 지밀 생각시의 경우 동몽선습(童蒙先習), 소학(小學), 내훈(內訓), 열녀전(烈女傳)을 비롯하여 극히 드문 경우이기는 하나 경서(經書)류까지도 배우게 됩니다. 그밖의 시간에는 투호(投壺)놀이 등의 전통 놀이를 즐기기도 하였습니다. 지밀나인의 경우에는 한층 격이 높은 다회(多繪)치기(비단실로 끈짜기)가 허용되었습니다.
▶ 궁녀의 재산
모든 궁녀와 궁녀의 하인까지도 보수를 받았습니다. 1년에 두 번 지급하는 옷값인 의전, 궁중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식사 즉 밥값인 선반, 현물인 쌀, 콩, 북어로 지급되는 삭료 세 가지가 이에 해당합니다.
이런 보수 체계에서 최고 위치인 제조상궁과 가장 적은 월급을 받는 궁녀를 비교하면 대략 5배의 차이가 났습니다. 최하위 궁녀들의 연봉은 쌀 10가마니에 해당되는데 이것은 시골에서 대여섯 식구가 배를 곯지 않고 살 수 있을 정도였으며, 조선 후기에는 제조상궁의 보수가 양반 관료보다 더 많았습니다. 게다가 궁궐에서만 근무하기에 상대적으로 지출도 적고 먹고 입고 쓴 웬만한 물품은 궁중에서 모두 해결하였기에 대부분의 궁녀는 입궁하는 순간부터 수입의 대부분을 온전히 저축하게 됩니다. 이렇게 3, 40년 근무하여 상궁이 되면 상당한 규모의 재산이 축적되어 대궐 밖에 자신의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재산관리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여유 있는 궁녀들은 기생은 물론 액정서의 별감이나 각 궁의 남자 종들도 여봐란 듯이 거느리고 다니며 꽃놀이, 뱃놀이를 질펀하게 즐겼다고 합니다. 이렇듯 궁녀는 여성에게는 관직의 길이 열려 있지 않았던 남성 중심의 조선사회에서 정식으로 월급을 받는 여성공무원이었으며, 어린 나이에 궁궐에 들어와 자기가 맡은 일에 평생토록 종사하는 전문직이었습니다. 그들의 업무는 왕실을 대상으로 하였기에 수준 높고 체계적으로 개발되었으니 가히 조선시대 커리어 우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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