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일본군 위안부 -김군자 할머니 증언

윤여설 2008. 1. 25. 14:02

일본군 위안부 -김군자 할머니 증언

 

어린시절

강원도 평창에서 삼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도를 닦다가 마흔살에 결혼하여 나를 마흔 두 살에 낳았다. 평창에서 5대가 살았다. 내가 여섯 살 때 우리 집이 분가했다. 보통 시골사람들이 먹고 살 정도로 살았다. 많지는 않았지만 논농사와 밭농사도 지었다. 그러나 학교는 다니지 못했다.

아버지는 내가 10세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어머니 나이 26이였다. 우리집에 아들이 없어서 큰집 작은 오빠를 양자로 들였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모든 재산을 오빠가 전부 가졌다. 그래서 어머니는 다음해 우리와 함께 주문진 친정으로 갔다. 집이 어려워 둘째 동생은 남의 집으로 보내고 어머니는 장터에서 평창의 신리에서 떡 장사하면서 살았다. 나는 주문진에서 혼자 3년 살다 다시 신리로 갔다. 그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열네 살에 다시 주문진으로 동생을 데리고 왔다.

 

동원과정

이모집에서 16살 때까지 살다 강원도 철원에 수양딸로 갔다. 그 집 아버지가 최철지라는 사람이었는데 순사였다. 열일곱 살(1942년) 3월에 최철지가 나더러 돈벌러 가라고 해서 30대쯤 되는 한국 남자와 함께 갔다. 처음에 나는 심부름을 보내는 줄 알고 검정치마에 연두색저고리를 입고 짐도 없이 아무것도 안 가지고 그냥 갔다. 그런데 기차를 타고 보니까 나와 같은 여자가 8명이 화물칸에 있었다. 낯선 여자들이라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기차에는 군인들이 굉장히 많았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한참을 갔다. 기차에서 내려 다시 트럭을 타고 한참을 가니 여관 같은 집이 나왔다. 이층집인 그 집에 내려 들어가니 그곳에 먼저 온 여자들이 아홉 명쯤이 있었다. 그곳이 바로 훈춘이었다.

 

군󰡐���위안소󰡑���생활

거기서 약 일년 반 있었다. 집 밖에는 사각형으로 된 󰡐���긴가쿠 이안죠󰡑���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담장도 대문도 없었고 밀고 닫는 미닫이문이었고 열면 문 양쪽으로 방이 있었다. 방벽을 타고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안마당이었다. 안마당에서는 하늘이 보였다. 마루는 방밖으로 안마당을 빙 둘러서 있었다. 1,2층에 각각 방 아홉 개씩이 있었고 그다지 큰방은 아니었다. 방안에는 담요만 있었다. 그 집에는 남자 둘에 여자 하나가 우리를 관리하며 살았다. 모두 한국사람이었다. 밥은 콩깻묵밥에 김치가 있었다. 목욕은 남자가 인솔해서 일주일에 한번씩 갔다. 목욕하는 동안 남자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토요일 날은 오후부터 군인 받고 오후 한 서너시 넘으면 왔다. 군인들은 일요일날 가장 많이 왔다. 그날은 아침 9시면 군인들이 와서 밤 7시 전에나 되야 갔다. 장교가 인솔해서 단체로 왔다. 군인은 사무실 거쳐서 앞마당에 방방이 줄을 섰다. 100명 넘게 기다린다. 그날은 걸어 다닐 수도 없고 생리해도 쉬지 못한다.

평일날은 군인은 오지 않고 장교만 왔다. 평일날 낮에는 피곤해서 잠만 잤다. 저녁에 장교가 오면 받고 장교는 자고 가기도 했다. 장교는 토요일, 일요일 밤에도 왔다. 처음 온 군인은 30대쯤 된 장교였는데 거절해서 두드려 맞았다. 뺨을 맞았는데 심하게 맞아 오른쪽 고막이 터져 지금도 듣지 못한다. 많이 올 때는 씻지도 못했다. 매주 금요일마다 성병검사를 했다. 군인트럭을 타고 군병원으로 갔다. 그 당시 󰡐���매독󰡑���이라는 성병에 걸린 적이 있었다. 군인은 상대하지 않았지만 매일매일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육백육 주사를 맞았다. 한 삼일은 맞았다. 냄새도 나고 그게(삿쿠) 어떤 것은 터지기도 했다. 터지기 때문에 안 하는 사람도 있었다. 군인들이 가지고 오는 것 같았다. 돈은 안주고 표를 주었다. 전부 주인이 받았다. 옷은 그냥 쓰봉(바지)입었었다. 윗옷은 아무거나 입었다. 빨래는 내가 했다. 신발은 게다(일본식 나막신) 였다. 겨울에도 게다 신었다.

도망간 사람은 없었다. 가서 몇 달 있다가 도망가려고 하던 사람도 있었다. 주인한데 붙잡혔다. 두드려 맞았다. 딴 사람들이 못하게 본보기 하느라고 많이 맞았다 남자가 지켰다.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아편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주인이 굉장히 싫어했다. 그러다가 임신을 하면 주인이 강제로 유산시켰다. 나는 생리가 열여섯에 시작해서 마흔여덟에 끝났다. 나도 임신을 했다가 유산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뒤 고까시(훈춘시 근처의 작은 지명, 일본식 발음)로 트럭을 타고 갔다. 그곳의 생활도 훈춘과 같은 생활이었다. 밥을 해먹는 것이나 성병검사를 받는 것이나 모두 훈춘생활과 같았다. 그곳에서 일년 반 동안 있다가 해방이 되었다. 그때 나이가 스무살이었다.

 

해방 후 생활

해방되고 나서 두만강을 건너 한달 여드레만에 철원으로 왔다. 철원에 와서 일년 정도 술집에서 생활했다. 그러다가 춘천 수용소를 거쳐 서울로 와 소개소를 통해 어떤 술집으로 갔다. 그곳에서도 잠시 머물다가 식모살이, 빵 장사, 옷 장사 등을 하며 생활하였다. 하도 박복한 운명이라 절에도 한 30년 다녀보고 세계정교라는 종교도 믿어보고 지금은 천주교회에 다닌다.

정선에서 세계정교의 기도처에서 죽을 작정으로 기도하고 있었는데 몸이 너무 아파 병원에 다니다가 군청의 도움으로 위안부 등록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몸이 너무 아파 98년 3월 나눔의 집으로 옮겨 오게 되었다.

항상 방을 깔끔히 정리하고 생활하며 매일 새벽에 기도 드린다. 남에게 폐가 되는 일과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아주 싫다. 다리 수술 등으로 많이 아프지만 매일 산책만은 빠뜨리지 않는다. 2000년 8월에는 󰡐���아름다운 재단󰡑���에 전 재산 5,000만원을 고아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기부했다.

억울하다. 남 하는 결혼 한번 안 하고, 어떻게 보면 자유롭다고도 할 수 있고 박복하다고도 하고...평생 살아 나온 게 이렇게 기구해. 남 보기엔 안 그럴 것 같다는데....

 

☆ 나눔의 집 : www.nanum.org에 가면 할머니들의 증언과 기록물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