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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정관헌.. 커피에 관한 소고(小考) [박기화]

윤여설 2008. 1. 19. 07:53
 
고종황제.. 정관헌.. 커피에 관한 소고(小考) [박기화]
올해 여름은 유난히도 비가 많이 왔다. 갑작스레 내리는 소나기에도 관람객들은 여기저기 비를 피했다가 관람하기를 반복하며 꼼꼼히 살펴본다. 문화유산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이 얼마나 신장하였는가는 관람객의 모습만을 보아도 쉽게 이해가 간다. 스치듯 지나가는 관람객도 있지만 이제는 고건물 하나하나에 눈을 떼지 않고 역사적 배경과 사건들을 물어가며 안내에 귀 기울이는 적극적인 관람객도 많이 늘었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하여 많은 자료를 알아본 후 관람하는 사람들도 눈에 띄게 늘고 있어서 그런 만큼 우리들은 더 긴장하고 더 공부하여야 한다.

덕수궁에 근무한 후, 항상 빠른 템포로 돌아가는 대한문 밖 서울 한복판의 모습은 덕수궁의 아름다움을 더욱 부각시키게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세월의 흐름에 그 역사적 의미와 존재를 지키려 안간힘을 쓴 듯한 느낌을 주어 숙연해지기도 한다. 덕수궁내의 고건물은 저마다의 사연과 가치가 있겠지만 유독 내게 관심을 불러일으킨 건물은 정관헌이다. 그 독특한 건축 형태에도 눈길이 가지만 당시의 상황을 상상하며 그려보는 것은 여간 재미난 것이 아니다. 대한제국. 정치적으로 풍전등화 같은 혼란스러운 시기였지만 문화적인 면에서는 다양할 수도 있었던 시기. 당시엔 혁신적이었으리만큼 기존의 형식과 다른 절충식 궁궐 건축물이 최초로 궁내에 지어졌던 것이다. 러시아의 건축가 사바찐에 의해 지어진 서양풍의 건축양식에 한국의 건축양식이 가미된 독특한 건물인데 1900년 건립된 이후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의 용도변경과 보수과정으로 원형에 대한 추정이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기는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건물은 20세기 초에 한반도에 서양의 건축가에 의해 서양풍의 건축양식이 우리나라의 문화 토양 속에 어떻게 적응, 변화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가 있다. 기존의 건물과 다른 형태로 지어짐에 따라 당시 궁내외의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흥미진진한 건물이었을까 상상이 간다.
[정관헌 전경]

고종은 명성황후 시해 후 일제의 야만적인 계략 앞에 손발이 묶여버린 심정으로 피신한 아관파천 이후, 몸과 마음을 추수려 덕수궁으로 돌아오고 다시 이 땅에 화려하고 강력한 제국을 꿈꾸었다. 고종황제는 연호를 건양에서 광무로 바꾸고 환구단, 사직단, 종묘 등에서 건원을 알리는 고유제(告由祭)를 지냈으며 반포문을 통하여 친일파와 일본의 횡포를 지적했다.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고 광무개혁으로 개혁의 의지를 분명히 드러내었다. 외세의 입김을 되도록 배제하고 자주적 개혁을 도모하면서 근대적 개혁을 이루려 노력한 것이다. 물론 자주독립국가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으나 시대를 역행하는 전제군주권의 강화라는 부정적인 평가도 받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역사적 사건들의 중심공간으로 덕수궁은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고종은 조선 제26대 왕(1863~1907)으로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1897년에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고치고 황제로 등극했다. 암울하고 혼란스런 시대를 살다간 임금으로 그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지만 나름의 개혁을 실시하고 1907년에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조선침략에 대한 부당성을 전 세계에 호소하여 꺼져가는 국운의 불씨를 되살리고자 조선의 자주화를 열망하는 의지를 보이심에는 의심할 바 없다. 그리고 1919년에 한 많은 삶을 뒤로 하고 승하하신다. 우리는 역사소설과 이를 바탕으로 한 사극드라마, 영화 등에서 많은 모습의 고종을 만나왔고 그 이미지가 각자에게 조금씩 다르게 각인되어 있다. 우리역사에서 손에 꼽히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라는 거대한 인물들도 모두 고종을 직접적으로 둘러싼 분들이었다. 역사적, 시대적, 공간적 모든 배경이 상상할 수 없는 중압감으로 뒤덮인 고종의 삶이었지만 그분에게 휴식과 여유의 공간이 만들어지고 이용되었다는 것이 흥미롭고 다행스러웠다.
[고종과 순종]

정관헌은 고종에게 휴식과 연회의 장이었다. 이와 결부하여 정관헌의 장소성에 대한 의의와 가치가 드러난다. 정관헌은 본래 고종이 차를 마시기 위하여 지어진 건물로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일종의 정자와 같은 역할을 했던 곳이다. 그러기에 비교적 지대가 높고 아늑한 곳에 조성되었고 침전과 외빈의 접대를 위한 함녕전 및 덕홍전 영역에서 가장 높이 위치하고 있어 앞을 굽어 볼 수 있으며, 행사를 위한 공간인 중화전 영역과 중화전 뒤편의 즉조당, 준명당, 석어당 지역과의 연계성도 뛰어났던 것이다. 건물의 용도와 대지의 선정이 매우 합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숨막히는 긴장의 연속인 일상에서 잠시나마 여유를 가지고 생각에 잠겼을 고종의 모습이 짐작되는 사실들이 있다. 고종은 정관헌에서 차를 마시는 것을 즐겼으며 고종께서 커피를 좋아하셨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커피는 1890년대 초 전파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고종은 1896년 아관파천 때 러시아 공사가 커피 열매를 건조하여 잘 으깬 다음 끓인 물을 놓고 맛있게 만들어 진상한 후 커피맛에 익숙해져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에 고종은 세자(후에 순종)와 함께 약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면서 커피를 마셨고 덕수궁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 맛을 잊지 못해 커피를 찾게 되었으며 이 때부터 커피는 궁중내의 기호 식품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한다.

고종의 휴식 시간의 여유도 잠깐이었을까. 1898년 러시아 역관으로 세도를 부리던 김홍륙이 친러파의 몰락으로 관직에서 쫓겨나고 또 러시아와의 통상에 거액을 착복한 사건이 들통나 흑산도 유배가 결정되자 김홍륙은 덕수궁에서 일하던 두 하수인을 매수, 고종의 생일에 아편을 대량으로 탄 커피를 마시게 하려다 발각되는 사건이 있었다. 고종은 대량의 아편이 든 커피의 맛을 보자마자 맛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잔을 내려놓았으나 세자는 단숨에 마셔버려 정신을 잃고 쓰러진 사건이었다. 고종은 국운이 지는 시기에 꺼져가는 불꽃을 살리려는 의지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굴욕스런 감정 사이의 생활에서 잠시나마 마음을 놓고 커피 한잔의 향을 음미하던 그 마저의 여유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게 된 것이다.

덕수궁 정관헌에서는 당시의 역사 및 장소의 상징성에 부합할 수 있도록 문화공연 행사와 각종 차 시음행사를 실시하여 관람객의 좋은 반응을 얻어내고 있다. 우연히 들른 덕수궁에서 그러한 역사적 배경을 설명 들으며 행사에 참여한 관람객의 얼굴에서 신기해하고 즐거워하는 표정이 가득하다. 당시의 고종황제와 궁 사람들의 표정도 그러했을까...
[정관헌 전통다례 체험]

[정관헌 전통다례 시연]

고종 황제는 국운이 다해가는 시기에 열강의 눈치를 보며 망국의 걱정에서 잠못이루다가도 가슴한편에 달아오르는 개혁에 대한 의지와 희망의 미래를 꿈꾸며, 달콤하게 차 한잔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잠시나마 정관헌에서 찾을 수 있었으리라 상상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고건물에 특히 애착이 가고 고맙게 느껴진다. 따뜻한 사연을 간직한, 웅장하게 드러나진 않지만 자기할 몫을 충실히 한 듯한 모습으로 관람객을 맞이하는 정관헌 앞에서 소소한 가을 바람의 향기를 느껴본다. 100년 전 이곳의 가을 바람인 것처럼...

▶ 문화재청 덕수궁관리소장 박기화 (문화재청에서 옮겨 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