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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송현동고분 녹나무 목관의 실체는?

윤여설 2008. 1. 22. 11:01
 
창녕 송현동고분 출토 녹나무 목관의 실체는?
 

 국내에서 처음 확인된 녹나무 목관은 비화가야의 고도인 창녕 송현동고분군 제7호분 발굴조사 출토유물이다.

 창녕 송현동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는 2005년부터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실시되었으며, 녹나무 목관이 출토된 제7호분은 제6호분과 연접된 표형분으로 횡구식석실내에 관대를 마련하고 그 위에 목관이 설치된 이례적인 모습이었다.
 창녕 송현동고분 제6·7호분의 석실크기는 길이 8.5m, 높이 2.2~2.6m, 바닥너비 1.5m 내외의 세장방형 석실이며, 석실 단면은 상부로 갈수록 내경하는 사다리꼴이다.

 제6·7호분의 매장주체부 특징은 석실 외부에 인두대 크기 정도의 할석으로 덮여있는 점이다. 제7호분에서는 석실의 관대와 횡구부 사이에 각재 12매가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도굴이 이루어진 양 고분에서는 토기류를 비롯하여 각종 금속유물, 목제 물 등 700여점이 출토되었다.
 7호분 석실내부의 유물들은 대부분 각종 유기물에 덮혀 있었으며, 소형 토기의 경우 소쿠리에 담긴 채 출토되어 매장행위 과정에서 유물의 매납방법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녹나무 목관은 2005년 7월 석실 밖으로 반출되어 현재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서 보관되고 있다.

 당시 목관이 확인되고 반출될 당시 국내외의 연구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으면서 구유형, 할죽형, 주형목관이니 하면서 많은 말들이 있었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서는 이러한 점에 관점을 두고 많은 조사를 하면서 확인한 결과 목관은 배를 재사용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출토된 녹나무목관의 크기는 길이 3.3m, 너비 0.9m, 높이 0.4m, 최대두께 9㎝ 정도로 비교적 대형 목제품이었다. 녹나무 목관의 부재는 출토당시 3개

 의 편이었으며, 돌로 만든 관대 위에 놓여 있는 주관재의 서쪽 장측면에는‘ㄷ’자 홈을 가진 부관재(밤나무)가 끼워져 있었다.

 남측 단측면에는 반원형의 마구리 목재가 있었는데, 두께는 목관의 장부구멍 약 5㎝ 정도였다. 주관재의 북측 바닥면에는 갈라진 옹이가 있는데, 이 부분 역시 다른 나무를 이용해 충진하여 물이 샐 수 없도록 하였다.

 그리고 주관재의 세 모서리에는 8×4㎝의 장방형 홈이 만들어져 있으며, 이 홈 중 두 군데에는 십자형의 쐐기가 박혀 있었다.

 이러한 모습의 목관이 출토될 당시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자생하지 않는 녹나무 제품으로 확인되자, 가야철기의 답례품이 아닌가하는 일본신문기사도 있었다.

 우리 연구소로 반입된 후 녹나무 목관을 보존처리하기 위하여 자세히 살펴 본 결과 목관의 주관재 양측면에는 약 30㎝ 간격으로 작은 장방형 홈이 각각 8개씩 파여져 있었는데, 이 부분은‘ㄷ’자 홈을 가진 부관재가 끼워져 처음에는 노출되지 않았으며, 홈에는 나무껍질 등으로 충진되어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일본에서 확인된 배의 구조에서 관찰되어진다.
 즉 준구조선(準構造船)에서 부재의 결합을 위하여 인공적으로 만든 홈들이다. 준구조선은 통나무 내부를 파내어 만든 단순한 통나무배와 여러 장의 선박재를 결합하여 만든 구조선의 중간 단계에 속하는 배를 말하는 것으로, 통나무배의 측면에 별도의 측판을 부착하여 배 내부의 공간을 확보하고 선체 전체를 보강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배를 이용하여 재사용한 경우가 있는데, 전체적인 모습으로 확인된 예는 없으나,
 우선 준구조선을 폐기한 후 이 선체를 우물에 사용한 경우(福岡縣 前原市 潤地頭給遺蹟 - 6매의 선체편이 확인되었는데, 배 바닥과 측판은 삼나무이고, 고물은 녹나무재를 사용한 것)와 목관으로 사용한 경우(千葉縣 館山市大寺山 동굴에서는 고분시대 중기~후기에 실제 사용하였던 배를 전용, 島根縣出雲市猪目동굴에는 통나무배를 절단한 목재 3매로 유골을 덮었음)가 확인된다.

 창녕 송현동고분 출토 목관은 배를 전용하여 목관과 유사한 형태로 변형하여 사용한 것으로 이해되며, 이는 단지 가야와 왜의 교류에 의한 녹나무제 배의 이입으로 볼 수 있다. 즉, 배의 이입보다는 녹나무 그 자체에 의미를 둘 수 있다고 여겨진다. 6호분 역시 석실의 구조가 7호분과 동일한 것이며, 그 내부에서 녹나무 편들이 수습되었기 때문에 6, 7호분의 연관성(표형분이 나타내는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한 개체의 배가 양 고분으로 나누어 재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여기서 녹나무의 특징 등을 살펴보아 녹나무를 중요시한 이유를 알아보자.

 녹나무는 더운 지방에 분포하는 아열대성 수목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크게 자라는 나무의 한 종류이다. 영어 일반명은 Camhpor Tree, 일본 이름은 クスノキ, 한자로는 樟(장), 豫樟(예장), 香樟木(향장목), 樟木(장목), 樟樹(장수), 樟腦木(장뇌목) 등의 이름을 갖는다.

 크게 자라면 지름이 5m, 높이가 40m정도에 이르는 거수(巨樹)이다. 녹나무 목재에는 장뇌향(樟腦香, Camphor)이라는 일종의 방충제를 함유하고 있어서 녹나무로 만든 옷장은 좀이 옷을 갉아먹지 않으므로 예로부터 고급 가구재, 의약용의 강심제, 무연화약의 제조 등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녹나무의 분포는 중국남부와 대만, 제주도, 일본남부의 규슈를 거쳐 관서(關西)지방에 이르는 곳이다. 대체로 중국남부가 중심 분포지로 볼 수 있으며 우리나라 제주도와 규슈 쪽으로 분포지가 물결 모양으로 퍼져 나간다.

 현재 가장 큰 나무가 많이 자라는 곳은 중국의 양자강 남부이며 杭州 일원에는 지금도 상당수의 녹나무가 남아있다. 대체로 우리나라 남해안은 녹나무 분포물결의 마지막 한계지역에 해당하는 곳으로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목관재가 출토된 경남 창녕지방을 비롯한 우리나라 남해안에 큰 녹나무가 자랐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그러므로 목관에 이용된 나무는 먼 이국에서 가져왔다고 추정할 수 있다. 장소는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고 녹나무 자원도 풍부한 규수지방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또 당시에는 목불과 배를 비롯하여 일본 사람들

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가 녹나무였다.


그럼 여기서 가야지역의 고분에서 나타나는 왜의 영향을 살펴보면서 가야와 왜 양국간의 교류를 파악해보자.

 의령 경산리고분군 출토 석관, 의령 운곡리고분군 돌선반, 거제 장목면의 왜계 석실, 산청 생초고분군 9호분의 주문경(珠文鏡)과 수혜기(須惠器), 고령 지산동고분군 44호분 출토 야광패제 국자, 의령 경산리 2호분의 마구류, 고성 내산리 34호분의 마구류 등에서 일본과의 관련성을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

 가야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는 왜계석실은 6세기 전반의 한정된 시기에 동시다발적으로 수용된 것으로 보이지만, 구조적으로 매우 다양하여 지역의 고유한 형식으로 정착되거나 계승되지는 않는다.

 즉, 이러한 모습은 거제의 장목고분(사다리형태의 현실 평면, 석실 측벽 하단부 장대석의 사용 등), 사천 선진리고분(대형 문주석, 현실개석과 연도개석의 당차가 없는 점 등), 의령 운곡리 1호분(동장형(胴張型)석실, 후벽에 설치된 돌선반 등), 의령 경산리 1호분(석옥형(石屋形)석관, 연도 폐쇄석 등), 고성 송학동 1B호분(적색안료 등) 등의 고분구조뿐만 아니라 각 유적에서 왜계유물들이 많이 확인되고 있다.

 이들 6세기 초반의 유적 유물들과 함께 창녕 송현동고분 출토 녹나무 목관 역시 왜와의 교류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창녕지역은 신라와의 교류로 인해 더 한층 왜와의 연관성을 지어야 할 것이다.


 왜(일본)산 나무가 관재로 확인된 주요유적을 살펴보자.

 1971년 공주 송산리고분군에서 발견된 무령왕릉에서는 왕(523년 사망)과 왕비(526년 사망)의 목관이 확인되었는데 관재는 금송(金松, コウヤマキ)이었는데, 금송은 일본 이외에는 자연분포지역이 알려져 있지 않은 수종이다.

 1917년 일본인 곡정제일(谷井濟一)에 의해 조사된 7세기 전반경으로 추정되는 익산시 팔봉동 소재 쌍릉(백제의 무왕과 왕비릉으로 추정)조사에서 복원이 가능할 정도로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목관이 확인되었는데, 할죽형의 뚜껑을 가진 목관으로 이 목관의 관재 역시 금송(金松, コウヤマキ)이었다. 이처럼 백제지역에서의 왕릉에서 확인되는 관재처럼 다른 고대왕국에서도 교류에 의한 많은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이들 목재와 관련하여『日本書紀』소잔오존(素盞嗚尊 : 스사노오노미고토 : 신라국의 군주를 의미는 新羅神)의 신화에 나타나는 이야기를 잠 시 살펴보자.

『日本書紀』卷第1神代(上)에 「한향의 섬에는 금은이 있다. 내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에 부보(浮寶 : 배)가 없으면 좋지 않을 것이다. 이에 소잔오존이 수염을 뽑아 흩어지게 하니 곧 삼나무가 되었다. 또 가슴의 털을 뽑아 날려 보내니 편백나무가 되었으며, 볼기짝의 털은 금송, 그리고 눈썹의 털은 녹나무가 되었다. 삼나무와 녹나무 두 나무는 배를 만드는데 쓰고 편백나무는 궁궐을 짓는데 쓰라. 그리고 금송은 백성이 산속에서 장사를 지낼 때 시신을 감싸는 관재로 쓰라」라는 내용이 있다.

 이처럼 일본에서는 나무의 종류를 용도에 맞게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창녕 송현동고분 출토 녹나무 목관은 배로 사용한 후 재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금송은 백제지역에서 관재로 사용되었음이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 문화재청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학예실 박종익 (문화재청에서 옮겨 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