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100년 전 역사를 열어 중명전(重明殿)을 다시 보다. [이귀영]

윤여설 2007. 12. 16. 16:44
 
100년 전 역사를 열어 중명전(重明殿)을 다시 보다. [이귀영]
100년 전 역사를 열어 중명전(重明殿)을 다시 보다.


역사란 과거를 비추어 보는 거울이던가. 이 거울에 100년 전의 한국을 비추어 오늘날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제 외세의 침탈과 간섭으로 전전긍긍하던 처지에서 벗어나 다른 나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만큼 당당히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국가로 성장하였다. 작전을 하듯 목숨까지 걸어 놓고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도모하여야 했으나, 100년이 지난 지금은 유엔사무총장까지 배출한 나라가 되어 있다는 사실은 꽤나 시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분단과 이를 둘러싼 강대국 간의 경쟁과 대립은 아직도 진행형이며, 과거의 모진 인과일 수밖에 없다.
요즈음 덕수궁 중명전에서 특별전(기간 : 7월 14일~9월 2일)을 준비하고 있다. 100년 전, 당시 대한제국의 상황과 이곳에서 일어난 굵직한 사건들, 수동적으로 또는 능동적으로 간여하고 이 거친 물살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던 100년의 선조들. 이를 두고 볼 수 없어 물살을 거꾸로 돌리는 것만큼 힘든 줄 알면서도 그렇게 살아야 옳을 수밖에 없었던 애국지사, 황제와 헤이그 특사들(종전에 밀사라고 불렀지만). 이번 전시는 100년 전 당시를 바라보고, 그분들의 헌신을 다시 한번 드러내어 오늘의 교훈으로 삼아 보고자 준비하는 특별전이다.

중명전의 전신인 왕실 도서관으로 지은 수옥헌

(1899년 3월 촬영, 아펜젤러 사진첩)

중명전(重明殿).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라는 고귀한 이름을 가진 이 서양식의 집은 덕수궁에 속한 건물로서, 1904년부터 1907년까지 대한제국 황제(고종)가 사용한 편전이었다. 이곳에서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이 이루어진 우리에게는 암울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들을 아는 사람들은 많으나, 그 사건이 일어난 격동의 공간 중명전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만큼 중명전은 궁벽진 곳에 갇혀버린, 지금의 위치만큼이나 우리 역사의 뒤 켠 한곳에 물러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중명전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여 격동의 현장이 된 것은 일본이 러시아와 한창 전쟁을 하고 있던 1904년 4월 14일의 일이었다. 당시 고종 황제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함녕전에 거처하고 있었다. 함녕전은 고종이 1897년 2월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온 후 황제의 침전으로, 관리와 외국 사절들을 만나는 접견소로 사용되었던 곳이었다.
저녁 9시 30분 무렵, 경운궁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일어났다. 황제는 급히 중명전으로 피신하였다. 이날 화재로 함녕전뿐만 아니라 정전인 중화전과 명성황후의 신주를 모신 경효전 등 많은 건물들이 사라졌다.
황제가 중명전으로 옮겨오게 되자 이곳은 황제가 외국의 사절들을 맞아들이고 집무를 보는 곳으로 바뀌었다. 수옥헌(漱玉軒)으로 불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도서관으로 건립된 건물이 정치 외교의 공간으로 변모한 것이다. 그리하여 고종황제는 1904년 경운궁 대화재 이후 1907년 7월 일본의 강요에 의하여 물러날 때까지 이곳에서 거처하였고, 중명전은 황실과 우리 역사의 씻을 수 없는 비운의 역사를 맞는 장소가 되었다.

화재 후에 다시 세운 중명전

고종 황제가 중명전에 있을 동안 이곳에서는 역사적으로 두 가지 큰 사건이 일어났다. 그 하나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1905년 11월 17일에 일어났다. 외세의 침탈에 대항할 기력을 상실한 대한제국을 향해 총칼을 앞세운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맺어졌다. 고종황제의 위임이나 승인이 없어 원천적으로 국제법상 무효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나, 그 결과 외교권을 빼앗기고, 내정을 심하게 간섭 받아 국가의 운명이 백척간두의 낭떠러지 끝에 서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에 어떻게 하든 국가를 지켜보고자, 국제사회에 직접 호소하고,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해 보고자 했던 그 노력의 하나로 제 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가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빌미가 되어 고종황제는 일제에 의해의 강제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헤이그 특사 파견은 결과적으로 고종황제의 마지막 국권회복 투쟁이 되고 말았다. 이제 실질적으로 대한제국은 멸망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암울한 일제강점기를 거쳐 더욱 심해진,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그 후유증을 유산으로 물려받게 되었다.
고종은 다시 세워진 함녕전으로 돌아갔으며 순종은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아 잠시 중명전에 거주하다 덕수궁으로 옮겼다. 그리하여 중명전은 외국인의 사교클럽으로, 영친왕비의 소유로, 때로는 민간회사의 임대 사무실 등으로 전전되다가 2007년에 덕수궁의 전각으로서 제 자리로 찾았다.

현재의 모습

지금 중명전의 모습은 많은 부분 남루하다. 덧대고 또 덧대어 붙이고 또 붙여 막아 놓은 실내 공간. 머리 위 그리 높지 않은 천장 안을 보면 예전에 썼던, 이곳 저것 허물어진 천정 석고보도가 보인다. 이것이 원래의 천장인가 싶어 확인해보면, 다시 그 위에 천장이 보인다. 이렇게 몇 차례 지나서야 원래의 구조물로 보이는 나무반자 형태의 천정이 드러난다. 어디 천정뿐인가, 벽도, 내부 곳곳을 이 곳 저 곳 막고, 나누어 놓은 칸막이벽도 덕지덕지 찍어 바른, 참 안 어울리는 화장처럼 원래 건물과는 거리가 멀다. 100여년의 세월을 넘겨 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싶지만, 어찌되었든 기우고 또 기워 입은 누더기 같은 옷, 이것이 중명전의 현 모습이다. 이 건물이 겪어 온 역사는 바로 우리 근대사의 여정과도 같이 복잡다단하고 기구하다.

을사늑약을 그린 풍자화


다시 돌아 와 100년의 한국을 생각한다.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어둠 속에서 대한제국이라는 침몰하는 배를 바라보는 심정, 나의 이성적인 판단은 우선 뒤로 물러서고, 울분과 비장함 그리고 형언하기 힘든 여러 감정들이 조수처럼 밀려든다. 그리고 자문해 본다. 왜 스스로를 괴롭히며 되돌아보고 있는가? 그러나 반드시 돌이켜, 다시 쳐다보고 싶지 않은 우울한 역사를 다시 돌아보아야 하는 까닭은 승리의 역사, 밝은 쪽의 역사만이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약은 쓰다고 했던가, 패배와 굴욕의 역사에 오히려 더 많은 교훈이 있고, 그리하여 미래에는 그와 같은 치욕을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또 다시 중명전(重明殿)을 바라보는 까닭은 이곳이 바로 이러한 과거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살아 있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장 이귀영

     (문화재청에서 가져 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