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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현장에서의 아쉬움 [성낙준]

윤여설 2007. 12. 6. 06:51
발굴현장에서의 아쉬움 [성낙준]


한국고고학은 경제발전과 더불어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양적 팽창은 놀랄 정도여서 발굴현장의 조사원이 일천 명을 넘는다고 한다. 이는 국토개발에 따른 구제 발굴 면적이 엄청나게 늘어나면서 빚어진 결과이다. 이러한 양적 팽창은 30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우리나라에서 구제발굴의 시작은 경제개발의 도약단계에 접어든 1970년대 수몰지역과 공단건설에 따른 유적발굴조사로부터 비롯되었다. 허나 당시만 해도 특별히 주요한 유적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이루어지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으며 소규모의 개발지역에 대한 유적발굴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특히 1980년대 대대적인 경지정리사업을 시행하면서 빚어진 유적 훼손은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이 무렵 사라져 가는 유적들을 살려내고자 하는 노력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고고학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사이 사라지기 일쑤였다.
<전남 구례군 소재의 고인돌 파손상태>

지금은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많은 유적발굴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1980년대만 하여도 연간 발굴조사 건수는 손에 꼽을 정도에 그치고 있었으며 규모 또한 요즘에 비하면 코끼리 비스켓에 불과한 정도였다.
영산강유역의 옹관고분에 대한 발굴조사는 일본인들에 의해 일제강점기 초기에 시작되었으나 광복후 이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1970년대말 광주에 국립박물관이 들어서면서 비롯되었다. 광주박물관은 학술조사의 대상을 영산강유역의 옹관고분에 초점을 맞추어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는데 당시 고고학의 햇병아리에 불과한 필자가 그 중심에 서서 수행하였다. 따라서 초창기 발굴조사에서 무지로 놓치고 그르치거나 실수로 중요한 정보를 얻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두고두고 후회와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영암 만수리2호분 발굴전경>


처음 발굴 조사했던 영암 만수리 고분은 비록 절반이 이미 훼손된 작은 규모의 고분이었으나 당시로서는 옹관과 함께 토광이 들어있을 것으로는 전혀 예상하기 어려웠고 더욱이 성토층에 토광이 들어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기에 토광묘가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놓치고 말았다. 이런 실수를 알아 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어지는 옹관고분의 발굴에서 첫 발굴의 실수를 감지하게 되었고 이런 실수가 반면교사가 되어 이후의 발굴조사에서는 성토층의 토광묘도 찾아 낼 정도로 발굴수준을 높여갈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로서는 최선을 다 한 조사였다고 자부하였음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막급인 경우도 없지 않은데 영암 내동리 초분골고분 조사가 그런 예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백제실에 전시중인 옹관은 영암 내동리 초분골고분에서 발굴한 것으로 개인적으로는 분신과도 같은 존재인데 발굴되자마자 긴급 복원을 거쳐 1986년 조선총독부건물로의 이전시에 백제실의 중앙에 자리잡은 이래 줄 곳 백제실을 지키고 있다. 영산강유역의 대형 전용옹관은 이 지역의 고대문화를 대표하는 표지적 유물로 지역적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큰 전용옹관은 왕릉에 버금갈 정도의 큰 무덤에 여럿이 함께 묻혀있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 묻힌 사람들이 이 지역의 토착 지배층 즉 통치력을 행사하던 최고지배자는 물론 일반에 이르기 까지 널리 성행한 묘제라는 점에서 동시기의 다른 지역의 고분과는 차별성을 띠고 있다. 당시의 토기제작기술로서 대형전용옹관의 제작은 첨단기술의 산물이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토기의 제작은 일정 크기가 넘으면 구울 때 주저앉기 마련인데 영산강유역의 대형옹관들은 초대형임에도 잘 구워진 것을 보면 그들만의 노하우를 갖추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즉 토기를 구울 때 주저앉지 않도록 설심 역할을 할 굵은 모래를 적당하게 배합하는 기술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요즈음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철근콩크리트의 철근 역할을 굵은 모래가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런 신기술의 채득으로 길이 2m 지름 2m에 가까운 초대형 옹관을 구웠낸 것이다.


<영암 내동리 초분골 고분 발굴전경>

<동 고분의 도랑조사 광경>

영암내동리 초분골 고분은 1970년대말 필자가 처음으로 확인한 것으로 1985년 산주가 개간허가를 받아 막 벌채를 끝내고 중장비로 삭토를 진행하려는 찰나에 필자에게 발각되어 긴급구제발굴을 서둘러 햇빛을 본 고분의 하나이다. 처음 발견할 당시 이미 옹관파편들이 지표면에 노출되어 있었기에 옹관고분임은 분명하였으나 숲이 우거진 상태에서는 봉토가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은 상태였다. 벌채된 상태에서 보니 나지막한 봉토가 분명하게 남아 있었고 산주의 동의로 긴급발굴에 착수할 수 있었다.

발굴조사는 당시 예산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착수하였고 매장시설에 대하여는 철저한 조사를 마쳤으나 봉토의 자락에 대한 확인조사는 트렌치로 확인하는 정도에서 그칠 수 밖에 없었다. 트렌치조사에서 확인된 도랑은 정연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장고형 즉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흡사한 모습의 키홀타입으로 추정이 가능하였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도랑을 전면적으로 드러내지 못한 탓에 큰 관심을 끌지는 못하였다. 초분골고분의 발굴이후 전형적인 장고형고분 즉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같은 고분들이 전남지역에서 확인되고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초분골고분의 도랑을 전면발굴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발굴조사후 한동안 잘 보존되던 이 고분이 어느 날 산주의 무지로 깔아뭉개졌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재조사의 기회마저 사라졌다는 허탈감에 가슴을 치고 후회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도 전시된 옹관을 보고 있노라면 그 때의 아쉬움이 자괴감으로 가슴을 저미게 한다.

▶ 문화재청 국립해양유물전시관장 성낙준    (문화재청에서 옮겨 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