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속에 담긴 역사
- 테마분류 ㅣ 역사
- 등 록 일 ㅣ 2012-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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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불교문화재연구소와 문화재청이 통일신라 46대 문성왕 때인 855년 제작된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國王慶膺造無垢淨塔願記)’를 발굴해 일반에 공개했습니다. 서울 종로구 조계사 내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일반인과 만난 이 금석문은 1157년 전 통일신라시대 동판에 새겨진 금석문으로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것이 특징입니다.
국와경응조무구정탑원기는 ‘무구정탑원기’로도 불리는데 탑의 건립 사유 등에 대해 기록한 탑지(塔誌)입니다. 원래는 경주 남산에 위치한 창림사 석탑에 있었는데 1824년 한 석공이 석탑을 무너뜨렸을 때 ‘무구정광다라니경’과 함께 발견된 것으로 전합니다. 그러나 원래 탑지는 이후 자취를 감추고 당시 추사 김정희가 모사한 모사본이 알려져 왔습니다.
이번에 발굴된 탑지는 가로 38.2cm, 세로 22.4cm, 두께 0.08cm, 무게 약 1kg으로, 주재료는 순동이고 금으로 도금이 돼 있습니다. 앞면에는 문성왕이 중생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발원문이, 뒷면에는 탑을 만드는 데 기여한 인물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염거화상탑지’(844), ‘황룡사구층목탑 찰주본기’(872)와 같이 지금까지 발굴된 통일신라시대 탑지에 비해 보존 상태가 깨끗해 전문가들은 불교․미술․서예사 등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금석문은 사료로서 매우 뛰어난 가치를 가집니다. 그 안에 역사가 숨어있기 때문에 잘 연구하면 그 시대 역사를 고증할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있습니다. 금석문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또 그 가치와 그 안에 쓰이는 글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지식자원관리사업으로 구축된 '문화재 학술조사 연구정보 DB (http://www.nricp.go.kr)'와 '한국역사정보 통합 DB (http://www.koreanhistory.or.kr)'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금석문(金石文)이란?
금석문은 말 그대로 철이나 청동 같은 금속성 재료나 비석처럼 석재에 기록한 금문(金文)과 석문(石文)을 합해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영역은 매우 넓습니다. 금문의 경우 금속제의 용기나 악기, 무기, 화폐, 인장(印章), 경감(鏡鑑), 조상(造像), 범종(梵鐘), 도량형 등에 주출(鑄出; 주형(鑄型)에 넣어서 만들어 내는 것)했거나 새긴 문자를 통칭합니다. 석문은 석재의 비나 묘지, 조상 등에 새겨진 문자를 포괄합니다.
중국에서는 금석 이외에도 거북이 등껍질이나 짐승 뼈에 기록한 갑골문(胛骨文)이나 토기, 기와, 벽돌 등에 있는 문자 등 금석문의 범위가 좀 더 넓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갑골문의 경우 별도의 분과에서 다루는 학문이 있기 때문에 금석문에서는 제외하고 있습니다. 또 금속 화폐에 주조한 명문 역시 동일 화폐 모두에 공통된 내용과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금석문에서 제외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금석문에 대한 정의나 내포 범위가 정교하게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종이로 만든 문서나 서책이 아닌 물건, 즉 돌, 금속, 나무, 직물, 토기, 기와, 벽돌과 같은 재료에 기입한 전통시대 문자나 기호, 그림을 금석문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도장의 인문(印文)은 명확하게 규정되진 않았지만 금석문에 포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 금석문의 종류
일반적으로 규정된 금석문의 종류를 알아보겠습니다.
> 비문(碑文)
돌을 다듬어서 세운 비석에 새긴 문장을 비문이라 합니다. 기록된 정보량이 많고 현존하는 비문도 비교적 많아 대표적인 금석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국 한나라 때 묘비에서 출발했는데 원래는 아무 것도 기록하지 않다가 후에 죽은 이의 공덕을 기록하기 시작했다고 전합니다. 비문의 종류는 내용에 따라 어떤 사실이나 인물, 건물의 내력을 기록한 기적비(紀績碑), 무덤 앞에 세워 그 주인공의 신원과 약력을 기록한 묘표(墓表), 능묘의 동남쪽에 세우는 신도비(神道碑), 국왕의 순수(巡狩) 사실을 기록한 순수비, 승려의 사리탑 부근에 세워 그 생애와 행적을 적은 탑비(塔碑), 국경비 등이 있습니다.
> 묘지(墓誌)
죽은 이의 신원과 생애, 태어나고 죽은 해 등을 기록하는 것으로 무덤방이 있을 경우엔 그 벽면에 내용을 직접 기록하기도 하고 석관 안쪽면이나 별도 석판에 조각해 시신과 함께 안치하기도 합니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무녕왕릉에서 발견된 묘지석의 경우 무덤 주인공과 백제 왕실의 국상, 장례 풍습을 알려준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 불상명문
현존하는 금문(金文)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으로 금동불이나 철불의 광배 뒷면에 불상을 조성하게 된 유래 등을 음각해 기록합니다. 고구려의 연가7년명 금동여래 입상에는 ‘6세기 전반 혹은 말에 고구려 승려들이 천불신앙을 유포하기 위해 이 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과 이를 위해 공양한 승려의 이름이 광배 뒷면에 4행 47자의 명문으로 실려 있습니다. 석조상 자체에 명문을 새기기도 하는데 통일신라의 감산사 아미타여래입상과 미륵보살입상이 그 대표적 예입니다.
> 종명(鐘銘)
말 그대로 종에 새긴 종명을 말합니다. 불교식 범종이나 기독교식 종을 제작할 때 해당 종교의 교의를 상징하는 문양과 함께 종을 만드는 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습니다. 현존 최고의 범종은 강원도 평창의 상원사 동종인데 종 윗면에 신라 성덕왕 24년(725) 진골귀족 가문의 시주를 받아 승려들이 참여해 제작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 도검명(刀劍銘)
칼에 새겨진 명문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남아있는 도검명이 많지는 않으며 백제의 '칠지도(七支刀)'가 대표적입니다. 칠지도는 현재 일본 천리시 이소노가미 신궁에 보관돼 있는데 칼 앞뒷면에 모두 61자의 명문을 금으로 상감해 기록해 놓았습니다. 보통 조선시대 도검명은 행운을 가져오고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는 형식적 문구나 별자리 그림을 상감처리한 것이 많은데 동아시아 도검에는 많은 정보가 명문으로 새겨져 있기도 합니다.
> 목간(木簡)
잣대나 목대 모양으로 다듬은 나무 조각에 문자나 그림을 적어 의사를 전달하는 것을 목간이라 합니다. 보통은 묵서하는 경우가 많으나 때에 따라서는 음각하거나 음각한 후 그 홈에 묵서를 덧씌우기도 합니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까지 널리 쓰였고, 종이 발명 후에도 표찰이나 패찰 등의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1970년대 중반에 경주 안압지 바닥에서 50여 점의 통일신라 목간이 출토됐는데 이후 현재까지 약 200여 점이 발견됐습니다. 경주의 월성 해자, 황남동, 하남 이성산성, 부여 궁남지, 쌍북리 등에서도 속속 목간들이 발견돼 고대사 연구에 활력을 주고 있습니다.
> 토기명문
음식물을 담아 먹거나 조리하고 저장하는 토기에 쓰인 명문으로, 신석기시대 이후 중요한 생활용품으로 사용됐기 때문에 이곳에 명문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간단히 단순한 기호나 한 글자만 적거나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으며 상당히 긴 문장을 기록한 예도 있습니다. 그러나 글자가 토기를 굽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긴 유약효과 이전에 쓰인 경우를 제외하고 바깥에 쓰인 경우는 제작자가 기록했는지 사용자가 기록했는지 판별이 쉽지 않은 것이 특징입니다.
> 와전명(瓦塼銘)
기와나 벽돌에 쓰인 명문으로 주로 건물이나 무덤의 용도, 주인공을 알려주는 문자를 와전에 기록합니다. 내용은 간단하지만 출토 유구(遺構)를 추정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공주 대통사지의 경우 명문와(銘文瓦)가 발견돼 옛 절터였음이 확인된 경우도 있고 공주 송산리 6호분에서 발견한 명문전에서는 ‘양나라 관요에서 구운 와를 본보기로 했다’는 문구가 발견돼 당시 백제와 중국 남조 국가 간 문화교류가 있었음을 확인하는 사료가 되기도 했습니다.
>> 금석문의 가치
금석문은 당시 사람들이 직접 글을 짓고 써서 남긴 유물입니다. 이런 자료를 당대자료, 1차 자료라 하는데 역사연구에 있어서 이런 자료의 중요성은 매우 큽니다. 역사를 연구할 때는 문헌인, 고고학자료, 미술자료, 금석문, 민속, 구술자료 등이 쓰입니다. 이들 자료는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당대자료와 후대자료입니다. 후대자료는 작성자나 시대적 조건에 따라 왜곡과 윤색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들 후대자료보다는 당대자료에 대한 사료적 가치를 높게 보고 있습니다. 금석문은 대표적인 당대자료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할 것은 있습니다. 금석문 자체도 문장을 짓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과장되거나 왜곡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이면에 감춰진 사실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또 인물이나 사건, 사물에 대한 내용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에 금석문에 담긴 사실을 일반화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또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부식되고 마모됐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훼손이 심해 판독자체가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출토된 금석문은 그 자체가 문자자료일 뿐 아니라 고고학 발굴자료로서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층위의 어떤 유구에서 어떤 유물과 어떤 상태로 출토되었는가에 따라 그 유물의 용도와 묻힐 당시의 상황을 판별할 수 있는 근거 자료가 돼 주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금석문이 사료로서 매우 귀중한 가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보존이 이뤄지고 있지 않다고 우려합니다. 또 금석문 자료를 한군데로 집대성한 정본 작업과 탁본작업을 통한 보존이라도 서둘러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 금석문 찾아보기
>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
봉암사에 있는 이 ‘지증대사적조탑비’는 당시 36세 대학자 최치원이 885년에 헌강왕으로부터 왕명을 받은 뒤 8년 만인 진성왕 7년 893년에 완성하고, 혜강 노스님이 새긴 비문입니다. 봉암사 유래와 지증대사 일대기가 소상히 기록돼 있는데 현재까지도 거의 모든 글자가 온전히 보존돼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 탑비는 왕명 이후 완성까지 장장 8년이란 세월이 걸렸는데 “신이 비록 무인의 재목이 아니기 때문이긴 하나, 문인이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긴다. 바야흐로 마음껏 재주를 부리려고 생각하던 차에 갑자기 주상전하의 승하하심을 당하였는데”란 대목으로 미루어 최치원이 왕명을 내린 헌강왕의 승하 소식에 영향을 받아 늦어진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비문을 짓는데 얼마나 심사숙고해 심혈을 기울였는지, 최치원은 비문을 통해 그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 ‘백규방효자비(白奎邦孝子碑)’
1811년 순조 11년에 효자 백규방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입니다. ‘1808년(순조 8년)에 일도(一道)의 유자(儒者)가 백규방의 효행을 상언(上言)하고, 도신(道臣) 서상정(徐相鼎) 공이 사계(査啓)하여, 순조가 정려(旌閭)를 세워 주도록 윤허하였다’고 비문에 기록돼 있습니다. 도신이 작성한 사계에 따르면, 고(故) 위장(衛將) 백규방(白奎邦)은 효행이 지극해 부모가 살아서는 정성으로 모시고 부모상을 당해서는 예법에 맞게 상례를 치렀으며 제사에 임해서도 목욕재계하고 극진한 정성을 보였으니, 이 같은 효행은 한 고을의 모범이 될 만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재 탁본이 성균관대 박물관에 소장돼 있으며 이 비는 문화재지정 국보로 지정돼 있습니다.
> ‘용암서원묘정비(龍巖書院廟庭碑)’
용암서원(龍巖書院)은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곳인데 비문에는 조식이 당시 학자들과 교유(交遊)했던 일과 그에 대해 평한 내용들이 기록돼 있습니다. 묘정비(廟庭碑)는 임신년(영조 28, 1752년)에 세워졌는데, 송시열(宋時烈)이 비문을 짓고 오철상(吳澈常)이 글씨를 썼습니다. 이에 따르면 조식은 15살에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참상을 목격한 뒤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선성(先聖)과 송나라 현인(賢人)을 사모해 육경(六經)과 성리학(性理學)연구에 힘썼습니다. 두 차례 주부(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명종 21년에 판관(判官)으로 승진시키고 유지(諭旨)를 두 차례 내리므로 임금을 인견(引見)한 뒤 도를 다스리고 학문을 하는 방도에 대해 논하기도 했으며 선조 초에는 당시의 폐단 10가지를 진달하기도 했던 인물이라 전합니다.
> ‘상원사종(上院寺鐘)’
강원도 평창 상원사에 있는 신라시대 동종입니다. 신라 725년(성덕왕 24)에 제작돼 현존하는 동종 가운데 제작시기가 가장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양식상으로도 성덕대왕신종과 함께 이 시기를 대표할 만한 종입니다. 국보 제36호로 원래 있었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안동루문에 걸려있던 것을 1469년(예종 1)에 왕명으로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보관해 오고 있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종은 모조품으로 원래 종구에 작은 균열이 생기자 이를 수리한 후 원래 종은 사용하지 않고 모조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종의 용뉴 좌우에 간단한 기록이 음각돼 있는데 모두 8행에 걸쳐 70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중 4자는 알아볼 수가 없지만 기록에 의하면 종의 제작시기와 들어간 놋쇠의 양, 제작에 참여한 승려 및 단월(檀越)들을 알 수가 있어, 당시 지방사회에서 사찰단위로 행해진 불사(佛事)의 실제 내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 참고문헌 및 사이트
ㅇ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http://gsm.nricp.go.kr)
ㅇ 향토문화자료실 (http://www.hyangto.pe.kr/main.htm)
ㅇ 카인즈 (http://www.kinds.or.kr)
ㅇ 네이버 백과사전․지식사전
국와경응조무구정탑원기는 ‘무구정탑원기’로도 불리는데 탑의 건립 사유 등에 대해 기록한 탑지(塔誌)입니다. 원래는 경주 남산에 위치한 창림사 석탑에 있었는데 1824년 한 석공이 석탑을 무너뜨렸을 때 ‘무구정광다라니경’과 함께 발견된 것으로 전합니다. 그러나 원래 탑지는 이후 자취를 감추고 당시 추사 김정희가 모사한 모사본이 알려져 왔습니다.
이번에 발굴된 탑지는 가로 38.2cm, 세로 22.4cm, 두께 0.08cm, 무게 약 1kg으로, 주재료는 순동이고 금으로 도금이 돼 있습니다. 앞면에는 문성왕이 중생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발원문이, 뒷면에는 탑을 만드는 데 기여한 인물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염거화상탑지’(844), ‘황룡사구층목탑 찰주본기’(872)와 같이 지금까지 발굴된 통일신라시대 탑지에 비해 보존 상태가 깨끗해 전문가들은 불교․미술․서예사 등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금석문은 사료로서 매우 뛰어난 가치를 가집니다. 그 안에 역사가 숨어있기 때문에 잘 연구하면 그 시대 역사를 고증할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있습니다. 금석문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또 그 가치와 그 안에 쓰이는 글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지식자원관리사업으로 구축된 '문화재 학술조사 연구정보 DB (http://www.nricp.go.kr)'와 '한국역사정보 통합 DB (http://www.koreanhistory.or.kr)'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금석문(金石文)이란?
금석문은 말 그대로 철이나 청동 같은 금속성 재료나 비석처럼 석재에 기록한 금문(金文)과 석문(石文)을 합해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영역은 매우 넓습니다. 금문의 경우 금속제의 용기나 악기, 무기, 화폐, 인장(印章), 경감(鏡鑑), 조상(造像), 범종(梵鐘), 도량형 등에 주출(鑄出; 주형(鑄型)에 넣어서 만들어 내는 것)했거나 새긴 문자를 통칭합니다. 석문은 석재의 비나 묘지, 조상 등에 새겨진 문자를 포괄합니다.
중국에서는 금석 이외에도 거북이 등껍질이나 짐승 뼈에 기록한 갑골문(胛骨文)이나 토기, 기와, 벽돌 등에 있는 문자 등 금석문의 범위가 좀 더 넓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갑골문의 경우 별도의 분과에서 다루는 학문이 있기 때문에 금석문에서는 제외하고 있습니다. 또 금속 화폐에 주조한 명문 역시 동일 화폐 모두에 공통된 내용과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금석문에서 제외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금석문에 대한 정의나 내포 범위가 정교하게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종이로 만든 문서나 서책이 아닌 물건, 즉 돌, 금속, 나무, 직물, 토기, 기와, 벽돌과 같은 재료에 기입한 전통시대 문자나 기호, 그림을 금석문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도장의 인문(印文)은 명확하게 규정되진 않았지만 금석문에 포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 금강경을 새긴 금석문인 '금강경판' 출처: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 바로가기 |
>> 금석문의 종류
일반적으로 규정된 금석문의 종류를 알아보겠습니다.
> 비문(碑文)
돌을 다듬어서 세운 비석에 새긴 문장을 비문이라 합니다. 기록된 정보량이 많고 현존하는 비문도 비교적 많아 대표적인 금석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국 한나라 때 묘비에서 출발했는데 원래는 아무 것도 기록하지 않다가 후에 죽은 이의 공덕을 기록하기 시작했다고 전합니다. 비문의 종류는 내용에 따라 어떤 사실이나 인물, 건물의 내력을 기록한 기적비(紀績碑), 무덤 앞에 세워 그 주인공의 신원과 약력을 기록한 묘표(墓表), 능묘의 동남쪽에 세우는 신도비(神道碑), 국왕의 순수(巡狩) 사실을 기록한 순수비, 승려의 사리탑 부근에 세워 그 생애와 행적을 적은 탑비(塔碑), 국경비 등이 있습니다.
▶ 황해도 개성에 위치한 고려시대의 돌다리인 선죽교에 세워진 비 출처: 21세기 북한 자연인문지리 DB ☞ 바로가기 |
> 묘지(墓誌)
죽은 이의 신원과 생애, 태어나고 죽은 해 등을 기록하는 것으로 무덤방이 있을 경우엔 그 벽면에 내용을 직접 기록하기도 하고 석관 안쪽면이나 별도 석판에 조각해 시신과 함께 안치하기도 합니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무녕왕릉에서 발견된 묘지석의 경우 무덤 주인공과 백제 왕실의 국상, 장례 풍습을 알려준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 불상명문
현존하는 금문(金文)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으로 금동불이나 철불의 광배 뒷면에 불상을 조성하게 된 유래 등을 음각해 기록합니다. 고구려의 연가7년명 금동여래 입상에는 ‘6세기 전반 혹은 말에 고구려 승려들이 천불신앙을 유포하기 위해 이 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과 이를 위해 공양한 승려의 이름이 광배 뒷면에 4행 47자의 명문으로 실려 있습니다. 석조상 자체에 명문을 새기기도 하는데 통일신라의 감산사 아미타여래입상과 미륵보살입상이 그 대표적 예입니다.
> 종명(鐘銘)
말 그대로 종에 새긴 종명을 말합니다. 불교식 범종이나 기독교식 종을 제작할 때 해당 종교의 교의를 상징하는 문양과 함께 종을 만드는 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습니다. 현존 최고의 범종은 강원도 평창의 상원사 동종인데 종 윗면에 신라 성덕왕 24년(725) 진골귀족 가문의 시주를 받아 승려들이 참여해 제작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 '봉선사대종'에 새긴 금석문 출처: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 바로가기 |
> 도검명(刀劍銘)
칼에 새겨진 명문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남아있는 도검명이 많지는 않으며 백제의 '칠지도(七支刀)'가 대표적입니다. 칠지도는 현재 일본 천리시 이소노가미 신궁에 보관돼 있는데 칼 앞뒷면에 모두 61자의 명문을 금으로 상감해 기록해 놓았습니다. 보통 조선시대 도검명은 행운을 가져오고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는 형식적 문구나 별자리 그림을 상감처리한 것이 많은데 동아시아 도검에는 많은 정보가 명문으로 새겨져 있기도 합니다.
▶ 백제의 도검 '칠지도(七支刀)' 출처: 국가문화유산 종합 DB ☞ 바로가기 |
> 목간(木簡)
잣대나 목대 모양으로 다듬은 나무 조각에 문자나 그림을 적어 의사를 전달하는 것을 목간이라 합니다. 보통은 묵서하는 경우가 많으나 때에 따라서는 음각하거나 음각한 후 그 홈에 묵서를 덧씌우기도 합니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까지 널리 쓰였고, 종이 발명 후에도 표찰이나 패찰 등의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1970년대 중반에 경주 안압지 바닥에서 50여 점의 통일신라 목간이 출토됐는데 이후 현재까지 약 200여 점이 발견됐습니다. 경주의 월성 해자, 황남동, 하남 이성산성, 부여 궁남지, 쌍북리 등에서도 속속 목간들이 발견돼 고대사 연구에 활력을 주고 있습니다.
▶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대덕 먹글씨 목간' 출처: 국가문화유산 종합 DB ☞ 바로가기 |
> 토기명문
음식물을 담아 먹거나 조리하고 저장하는 토기에 쓰인 명문으로, 신석기시대 이후 중요한 생활용품으로 사용됐기 때문에 이곳에 명문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간단히 단순한 기호나 한 글자만 적거나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으며 상당히 긴 문장을 기록한 예도 있습니다. 그러나 글자가 토기를 굽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긴 유약효과 이전에 쓰인 경우를 제외하고 바깥에 쓰인 경우는 제작자가 기록했는지 사용자가 기록했는지 판별이 쉽지 않은 것이 특징입니다.
> 와전명(瓦塼銘)
기와나 벽돌에 쓰인 명문으로 주로 건물이나 무덤의 용도, 주인공을 알려주는 문자를 와전에 기록합니다. 내용은 간단하지만 출토 유구(遺構)를 추정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공주 대통사지의 경우 명문와(銘文瓦)가 발견돼 옛 절터였음이 확인된 경우도 있고 공주 송산리 6호분에서 발견한 명문전에서는 ‘양나라 관요에서 구운 와를 본보기로 했다’는 문구가 발견돼 당시 백제와 중국 남조 국가 간 문화교류가 있었음을 확인하는 사료가 되기도 했습니다.
>> 금석문의 가치
금석문은 당시 사람들이 직접 글을 짓고 써서 남긴 유물입니다. 이런 자료를 당대자료, 1차 자료라 하는데 역사연구에 있어서 이런 자료의 중요성은 매우 큽니다. 역사를 연구할 때는 문헌인, 고고학자료, 미술자료, 금석문, 민속, 구술자료 등이 쓰입니다. 이들 자료는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당대자료와 후대자료입니다. 후대자료는 작성자나 시대적 조건에 따라 왜곡과 윤색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들 후대자료보다는 당대자료에 대한 사료적 가치를 높게 보고 있습니다. 금석문은 대표적인 당대자료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할 것은 있습니다. 금석문 자체도 문장을 짓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과장되거나 왜곡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이면에 감춰진 사실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또 인물이나 사건, 사물에 대한 내용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에 금석문에 담긴 사실을 일반화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또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부식되고 마모됐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훼손이 심해 판독자체가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출토된 금석문은 그 자체가 문자자료일 뿐 아니라 고고학 발굴자료로서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층위의 어떤 유구에서 어떤 유물과 어떤 상태로 출토되었는가에 따라 그 유물의 용도와 묻힐 당시의 상황을 판별할 수 있는 근거 자료가 돼 주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금석문이 사료로서 매우 귀중한 가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보존이 이뤄지고 있지 않다고 우려합니다. 또 금석문 자료를 한군데로 집대성한 정본 작업과 탁본작업을 통한 보존이라도 서둘러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 금석문 찾아보기
>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
봉암사에 있는 이 ‘지증대사적조탑비’는 당시 36세 대학자 최치원이 885년에 헌강왕으로부터 왕명을 받은 뒤 8년 만인 진성왕 7년 893년에 완성하고, 혜강 노스님이 새긴 비문입니다. 봉암사 유래와 지증대사 일대기가 소상히 기록돼 있는데 현재까지도 거의 모든 글자가 온전히 보존돼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 탑비는 왕명 이후 완성까지 장장 8년이란 세월이 걸렸는데 “신이 비록 무인의 재목이 아니기 때문이긴 하나, 문인이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긴다. 바야흐로 마음껏 재주를 부리려고 생각하던 차에 갑자기 주상전하의 승하하심을 당하였는데”란 대목으로 미루어 최치원이 왕명을 내린 헌강왕의 승하 소식에 영향을 받아 늦어진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비문을 짓는데 얼마나 심사숙고해 심혈을 기울였는지, 최치원은 비문을 통해 그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 출처: 문화재 학술조사 연구정보 DB ☞ 바로가기 |
> ‘백규방효자비(白奎邦孝子碑)’
1811년 순조 11년에 효자 백규방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입니다. ‘1808년(순조 8년)에 일도(一道)의 유자(儒者)가 백규방의 효행을 상언(上言)하고, 도신(道臣) 서상정(徐相鼎) 공이 사계(査啓)하여, 순조가 정려(旌閭)를 세워 주도록 윤허하였다’고 비문에 기록돼 있습니다. 도신이 작성한 사계에 따르면, 고(故) 위장(衛將) 백규방(白奎邦)은 효행이 지극해 부모가 살아서는 정성으로 모시고 부모상을 당해서는 예법에 맞게 상례를 치렀으며 제사에 임해서도 목욕재계하고 극진한 정성을 보였으니, 이 같은 효행은 한 고을의 모범이 될 만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재 탁본이 성균관대 박물관에 소장돼 있으며 이 비는 문화재지정 국보로 지정돼 있습니다.
> ‘용암서원묘정비(龍巖書院廟庭碑)’
용암서원(龍巖書院)은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곳인데 비문에는 조식이 당시 학자들과 교유(交遊)했던 일과 그에 대해 평한 내용들이 기록돼 있습니다. 묘정비(廟庭碑)는 임신년(영조 28, 1752년)에 세워졌는데, 송시열(宋時烈)이 비문을 짓고 오철상(吳澈常)이 글씨를 썼습니다. 이에 따르면 조식은 15살에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참상을 목격한 뒤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선성(先聖)과 송나라 현인(賢人)을 사모해 육경(六經)과 성리학(性理學)연구에 힘썼습니다. 두 차례 주부(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명종 21년에 판관(判官)으로 승진시키고 유지(諭旨)를 두 차례 내리므로 임금을 인견(引見)한 뒤 도를 다스리고 학문을 하는 방도에 대해 논하기도 했으며 선조 초에는 당시의 폐단 10가지를 진달하기도 했던 인물이라 전합니다.
> ‘상원사종(上院寺鐘)’
강원도 평창 상원사에 있는 신라시대 동종입니다. 신라 725년(성덕왕 24)에 제작돼 현존하는 동종 가운데 제작시기가 가장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양식상으로도 성덕대왕신종과 함께 이 시기를 대표할 만한 종입니다. 국보 제36호로 원래 있었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안동루문에 걸려있던 것을 1469년(예종 1)에 왕명으로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보관해 오고 있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종은 모조품으로 원래 종구에 작은 균열이 생기자 이를 수리한 후 원래 종은 사용하지 않고 모조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종의 용뉴 좌우에 간단한 기록이 음각돼 있는데 모두 8행에 걸쳐 70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중 4자는 알아볼 수가 없지만 기록에 의하면 종의 제작시기와 들어간 놋쇠의 양, 제작에 참여한 승려 및 단월(檀越)들을 알 수가 있어, 당시 지방사회에서 사찰단위로 행해진 불사(佛事)의 실제 내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 신라시대의 동종인 '상원사종(上院寺鐘)' 출처: 문화재 학술조사 연구정보 DB ☞ 바로가기 |
※ 참고문헌 및 사이트
ㅇ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http://gsm.nricp.go.kr)
ㅇ 향토문화자료실 (http://www.hyangto.pe.kr/main.htm)
ㅇ 카인즈 (http://www.kinds.or.kr)
ㅇ 네이버 백과사전․지식사전
- 국가지식포털 객원기자 이동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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