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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밥상 전통 소반

윤여설 2011. 2. 6. 20:48

문화재사랑 2011.01.24 15:19

 

 

 

 

안녕하세요 오늘은 한국 전통공예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으로

'전통 소반'을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 네이버백과사전

 

 

루시드 폴 4집 <레미제라블>음반을 들어보면

 " 그동안 내가 지켜온 수많은 가족들의 저녁밥상"이라는 가사가 나온다.

맥락은 다를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우리 가족은 한 밥상에 모여 식사하는 경우가 참 드물다.

 

나는 '밥상'이 가족이라는 유대관계에 있어 문화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조선총독부 관료출신 아사카와 다쿠미도 <조선의 소반>(1929) 책에서 "한 가정의 식탁으로서 단란함의 중심이 되기도 하는 소반이 칠이 벗겨지거나 다리가 흔들려 불안한 느낌을 준다면

그것이 가정에 미치는 직,간접적인 손해가 결코 적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그만큼 옛 사람들에게도 밥상의 의미는 남달랐을 것 같다.

이것이 '전통소반'이 궁금해진 이유이다.

 

 ⓒ 네이버백과사전

 

 

 

소반의 개념

 

- 소반은 '상판(반)'과 '다리(각)'로 구성된 기본적인 생활 공예품으로 책상이나 음식상의 형태가 가구로 발전한 것이다. 이를 지칭하는 용어로는 반(槃), 상(床), 안(案), 탁(卓) 등 여러가지가 있고 때로는 '조(俎)'도 유사어로 고대에 많이 쓰였다.

 

 소반은 '작은 상'이라는 뜻이다. 물론 옛날 상들이 전부 작은 것은 아니고 네 사람이 먹는 사인상이나 돌잔치용 돌상, 떡시루상은 큰상이다. 또 약상이나 김을 노는 김상처럼 용도에 맞게 보통보다 훨씬 작게 만들어진 것도 있었다. 그렇지만좌식 생활문화에 맞게 손쉽게 이동할 수 잇는 작은 상이 가장 일반적으로 쓰였기 때문에 몯를 아울러서 소반이라고 불렀다.

 

무용총 주실 좌부 벽화 ⓒ 네이버                                     각저총 후실 벽화 ⓒ 네이버

 

 

소반의 역사

 

 우리나라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와서야 겨우 목기 유물 발굴품을 볼수 있는데 그 수량도 만지는 않다. 고구려 고분벽화(각저총, 무용총, 안악3호분, 약수리 고분, 매산리 사산총 등) 통해 소반이 조선시대 뿐 아니라 고대사회에서도(적어도 왕실이나 귀족층에) 사용되었다는 것을 가늠해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림만으로는 이것이 목반인지 아닌지 확실히 알 수가 없고 크기도 짐작할 수 없다. 다행ㅣ 1977~1982년 사이 일본에서 발굴 조사된 '경도부 중군 봉산정' 고분에서 출토된 목공예품 가운데 고구려 고분벼과에 그려져 있는 4각성과 비슷한 것이 출토되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고증할 수 있게 되었다. 소반의 기원을 밝히는 데에는 역시 한계가 있지만 <삼국사기>나 <고려사>, <고려도경>같은 문헌기록에서도 그 면모를 찾을 수 있다.

 

정지용생가터의 소반  ⓒ네이버백과사전

 

소반의 대중화

 

-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조선시대 이전까지 고구려 고분벽화나 경주 안압지 출토 유물에서 보이는 것처럼 목공예품들은 전부 왕실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고려시대에도 왕궁 안에 목공예 공장과 장인을 두고 직접생산하였는데 귀족과 사원 승려만을 위한 것이었다.

 

 소반이 대중화된 것은 조선시대였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같은 전란이 계속되면서 수공업이 소규모의 가내 수공업 형태로 분업화 되고 기술자들이 독자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사공장이 출현하면서다. 당시 조선사회는 전란을 겪으며 수공업이 분업화되어 전국으로 흩어지고 교역이 줄어들면서 문물 공급에 제한을 받았다. 지배계급인 사대부들도 유교이념을 받아들여 검소하고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이에 따라 일상 용품도 경제적이고 기능위주로 발전하게 되었고 소반 생산에도 영향을 미쳐 서민 상품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더구나 영-정조 시대에 오면서 이미 많은 가정에서 소반은 생활필수품으로 여겨졌고 소반 장인들이 상법을 어기고 직접 몰래 내다 파는 '암매'가 성행하면서 급격히 대중화 되었다. 조선 말기에는 일반의 사용을 금하고 궁 안에서만 사용햇던 주칠반까지 대중화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전통가옥 전경 / 주거공간과 분리된 조선시대의 부엌

 

 

 

조선시대 주거형태와 소반

 

- 앞서 좌식 생활문화에 맞게 손쉽게 이동할 수 있는 소반이 가장 일반적이기 때문에 큰상, 작은 상 가릴 것 없이 모두 소반으로 불렀다고 했다. 이러한 좌식 생활문화에 맞춘 소반은 주거형태와 아주 밀접하다. 조선시대 이전까지 옛 사람들의 생활방식은 입식과 좌식의 혼용을 보여주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완전한 '평좌식 생활문화'가 자리 잡게 되었다. 이것은 온돌양식이 주거생활에 보편화되면서 나타난 변화였다. 또한 조선사회의 지배이념인 유교의 영향으로 안방, 마루, 사랑방 같은 주거공간과 부엌이 분리되면서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없어졌다.

 

 결국 소반이 식사가 가능한 주거공간과 부엌을 잇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부텈에서 조리된 음식ㅇ르 소반에 올려 방에 나르고, 방에선 소반을 받은 그대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옛 그릇들은 사기같이 무겁고 둔한 것이 많아 소반 하나에 많은 그릇을 나르기 힘들었기 때문에 1,2인용 식기를 얹을 수 잇는 수반형으로 크기가 작고 가벼운 소반이 만들어졌다. 

 

궁중에서 화려하게 제작되어졌던 8각 소반 ⓒ 네이버

 

전통 소반의 쇠퇴

 

- 근대화가시작된 조선 말기에 오면 주거공간과 분리되어 있던 부엌이 점차 실내에 자리하게 디고 부엌가구에 '식탁'이 등장하게 된다. 소반은 더 이상 운반기능과 식탁기능을 하는 생활필수품으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 공예사 연구에서도 조선시대 말기는 소반을 비롯해 전통 목가구의 쇠퇴기로 평가된다. 수요가 줄어들지는 않지만 교통이 발달하면서 주 생산지였던 통영, 나주, 해주 등의 지역적인 특성보다 소반 자체의 장식성에 치중하게 되었다. 대량생산되는 목공예푸마다 상표 표시하게 된 공업화 이후에는 전통 공구와 제작 기법에 익숙한 장인들의 입지가 좁아졌다. 각종 목공기계가 도입되면서 소반 제작에 합판이 사용되고 짜임보다는 못을 사용하는 경우가 늘었고, 제작 방식이 간소화 되고 형태를 만들어 내는 데 그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전통 수공업 형태의 가구제작은 차츰 침체될 수 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조선 말기의 소반이 시대적 흐름에 맞추어 산업화 되어가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전통 소반이 다양한 개념적 형태적 변화를 겪으며 계속해서 발전은 하지만 새로운 형태의 주거환경에서는 더 이상 중요한 생활필수품으로 인식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 제2기 문화재청 대학생 블로그기자단  김선경 기자 

 

 

<참고문헌> 아사카와 다쿠미, <조선의소반 조선도자명고> 학고재, 1996

                 나선화, <소반> 대원사, 2002

                 배만실, <한국의 전통공예 소반> 이화여대 출판부, 2006

 


 

 

            출처  http://blog.daum.net/munhwajaecheong/17918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