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의恨이 서린하남성 낙양
◆9개 왕조의 수도·황하의 중심, 낙양지난 19일 오후 4시 20분 중국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을 출발한 고속열차 화해호(和諧號)는 1시간 40분 만에 370㎞ 떨어진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에 도착했다. 순간 최고속도 350㎞. 하남성은 황하(黃河) 남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황하 유역은 예부터 중국인들의 정신적인 고향이자 정치·군사·문화의 중심지였다. 지금은 연해지역에 뒤졌지만, 인구 1억 명의 시장을 바탕으로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황하 중심에 있는 낙양은 동주(東周), 후한(後漢), 서진(西晉), 후당(後唐) 등 9개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낙양은 낙수(洛水·지금의 洛河)에서 유래했다. '낙양'의 발음이 '떨어지는 태양'을 뜻하는 '낙양(落陽)과 같다고 해서, 은근히 미신을 좇는 모택동(毛澤東)은 한 번도 낙양을 방문한 적이 없다고 한다. 백성들로부터 '태양'으로 추앙받고 있었던 탓이다. 우리말에 책이 잘 팔리는 것을 뜻하는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는 표현이 이 낙양에서 유래했다.
- ▲ 중국 하남성 낙양에 있는 용문석굴 / 지해범 중국전문기자
◆의자왕, 낙양에서 비운의 생을 마감하다
낙양과 가장 인연이 깊은 한국인은 의자왕(義慈王)이다. 한때 '해동증자'로 칭송받던 의자왕은 재위 16년째부터 사치와 방종에 빠져 충신을 박해하고 국정을 게을리하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패해 당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삼국사기' 등에 따르면, 그는 태자 효, 왕자 융, 그리고 백성 1만2000여명과 함께 당으로 압송된 뒤 곧 병사했다.
그가 묻힌 곳은 낙양 북쪽 망산(邙山)에 있다는 손호(孫皓)와 진숙보(陳叔寶) 무덤 옆으로 알려져왔다. 손호는 손권(孫權)의 손자로서 오(吳)의 마지막 왕이고, 진숙보는 남조 진(陳)의 마지막 왕으로, 둘 다 주색과 폭정으로 나라를 잃었다. 당(唐)이 의자왕을 이들 옆에 묻은 것은 백제왕을 격하하면서 동시에 후세에 경계를 삼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망산, 즉 북망산은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으로 시작하는 '성주풀이'의 노랫가사가 가리키는 곳이다.
행정구역으로는 망산진(邙山鎭)이며, 시 중심에서 4㎞쯤 떨어져 있고 그 범위도 매우 넓다. '산'이라고 하지만 실제 가보면 얕은 구릉에 채소밭이나 과수원이 대부분이다. 이곳에 한(漢)대 이후 여러 왕조의 무수한 제후와 귀족들이 묻혔다. 그래서 '북망산천 간다'는 말은 곧 죽음을 뜻한다.
- ▲ 낙양 북쪽 망산에 있는 효문소황후의 묘 / 지해범 중국전문기자
지난 20일 오전 시골길을 물어 물어 봉황대촌에 도착했을 때, 현지 주민들은 마을 뒤쪽의 넓은 밭〈사진〉을 가리키며 "이 부근이 한국의 국왕이 묻혔던 곳"이라고 말했다. 그곳은 평평한 토지로 파란 보리싹만이 고개를 내밀었고 밭 한가운데로 시멘트 도로가 나 있었다. 한 주민은 "50년대 어느 해 비가 많이 내린 날, 멀쩡하던 밭이 둥근 모양으로 4~5m 밑으로 꺼졌는데, 꺼진 땅의 지름은 10m 정도였다. 그때 정부에서 와서 발굴을 했는데, 높이 1m 정도의 석관이 나왔고 한국 왕의 묘라는 얘기가 있었다. 그 뒤로 묘지는 덮였고 밭으로 변했다"고 했다. 그의 진술을 들어보니, 우리 정부가 중국의 협조를 받아 석관의 존재를 확인하고 정밀 발굴작업을 벌인다면, 의자왕 묘를 찾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1㎞쯤 떨어진 곳에는 진숙보의 묘로 알려진 분묘가 있었다. 높이와 지름이 20m 정도여서 의자왕 묘의 형태를 짐작게 했다. 그러나 묘지 꼭대기는 고구마밭으로 변해 있었고, 밭 한가운데는 깊이 5~10m의 도굴구멍이 2개 나 있었다. 소중한 유적을 왜 방치하느냐고 묻자, 주민은 "묘지가 워낙 많아 일일이 관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의자왕의 묘도 1300여년의 긴 세월 동안 이렇게 방치되고 훼손되다가 끝내 멸실되었을 것을 생각하면, 중국을 탓하기 전에 우리 자신의 무관심과 나약함을 먼저 탓해야 할 것 같다.
- ▲ 북위의 선무제가 어머니 효문소황후를 기려 조성한 용문석굴내 빈양남동의 아미타불. 어머니의 얼굴을 본 떠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 지해범 중국전문기자
◆북위 7대 황제 선무제의 어머니, 고구려인 고조용
낙양에는 고구려인의 후예로 황후에까지 오른 '고조용(高照容)'의 사연도 숨어있다. 고조용은 선비족이 세운 나라인 북위(北魏·386~534년)의 6대 황제 효문제(孝文帝)의 후궁이었다가 사후에 황후로 추존된 인물이다. 그녀는 효문제와의 사이에 맏아들 원각(元恪)과 원회(元懷), 장락공주(長樂公主) 등 2남 1녀를 낳았는데, 그중 맏아들이 7대 황제 선무제(宣武帝)가 된다. 그녀는 효문제가 평성(지금의 산서성 대동)에서 낙양으로 수도를 옮기는 도중 갑자기 죽었다. 위서(魏書)는 나중에 황후가 되는 풍소의(馮昭儀)가 그녀를 암살했다는 풍문을 기록했다. 맏아들 원각은 황제가 되자 어머니를 황후[孝文昭皇后]로 추존했다. 낙양 외곽 망산진에는 효문제의 능인 장릉(長陵) 부근에 고조용의 무덤〈사진〉이 있다.
그녀의 얘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낙양이 자랑하는 불교문화유적인 용문(龍門)석굴에도 효문소황후에 얽힌 얘기가 있다. 용문석굴은 대동(大同)의 운강석굴, 돈황의 막고굴과 함께 중국의 3대 석굴로 꼽힌다. '위서(魏書)'에 따르면, 선무제는 서기 500년 아버지 효문제와 어머니 효문소황후를 위해 2개의 석굴을 조성하는데, 그것이 '빈양동(賓陽洞)'이다. 총 24년에 걸쳐 만들어진 이 석굴은 남동·중동·북동 등 3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중 중동이 아버지, 남동이 어머니를 기려 조성한 것이다.
남동은 높이 9m, 너비 8m이며, 가운데 아미타불〈작은 사진〉이 앉아있고, 양쪽에 2명의 제자와 2명의 보살이 서 있다. 전하는 바로는 선무제가 어머니의 얼굴을 본떠 아미타불을 조성했다는 얘기가 있다. 이에 대해 낙양박물관 용문석굴 분소장은 "어머니를 기려서 만든 것은 맞지만, 그의 형상을 본떴다는 것은 기록에 없다"고 대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인의 피가 2분의 1 섞인 선무제가 어머니를 기려 만든 빈양남동의 아미타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인자한 한국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 ▲ 백제 의자왕의 묘터였다는 밭.
◆백제의 배신자 흑치상지와 고구려인 천남생
망산에는 백제 유민 흑치상지(黑齒常之) 부자와 고구려의 권력자 연개소문의 아들인 천남생(泉男生) 일족의 무덤도 있다. 흑치상지는 백제가 망하자 부흥운동에 참여했으나, 후에 배신하여 당나라 장군이 되었다. 그는 돌궐·토번과 여러 차례 싸워 이긴 명장이었다. 그러나 '무측천의 개'였던 혹리 주흥(周興)의 모함을 받고 투옥되어 결국 감옥에서 자살했다. 천남생은 원래 연(淵)씨였으나, 당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이름과 같다고 하여 천(泉)으로 바꾸었다.
연남생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막리지가 되었으나 동생인 남건 등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해 당나라에 투항했고, 당나라의 향도가 되어 조국을 멸망시키는데 앞장섰다. 천남생은 매국의 대가로 대장군(大將軍)에 올랐고, 아들 천헌성(泉獻誠)은 최고 부자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천헌성은 혹리 내준신(來俊臣)의 모함으로 투옥되었다가 감옥에서 목졸려 살해당했다. 하늘은 매국노 가문이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놔두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일보 10년 10월 29일자에서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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