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군과 풍덕군 접경 지역에 있는 경천사탑은 고려 공민왕 때에 공주를 위해 옥석(대리석)으로 10여 층(10층)이 되게 세운 수백 년 된 유물이다. 한데 무슨 허기를 받았는지, 일본인들이 그 탑을 무너뜨려 일본으로 실어간다 하기에, 두 군민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빼앗기지 않겠다고 결사적으로 맹세하였다고 한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12일자 잡보
군민들이 한 맹세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일본인들의 시도는 좌절되었을까요?
안타깝게도 일본인들의 시도는 성공하게 됩니다. 이 기사의 앞뒤가 궁금하시죠?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전에 문제의 핵심인 '경천사탑'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볼게요.
경천사탑....
그러니깐...경천사십층석탑...
어디서 많이 들어보시지 않았나요?
음.. 아직 모르시겠다구요?
그럼 ... 이 사진을 보면 생각이 나실까요? ^^
ⓒ 『수난의 문화재 이를 지켜낸 인물이야기』, 문화재청 엮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죠? 맞습니다.
이 탑은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1층 홀에 전시되어 있는 '경천사십층석탑', 국보 제 86호랍니다!!
이 탑은 1348년, 고려때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 자락 경천사에 세워지게 됩니다.
«고려사»를 통해서 예종이 이곳 경천사에서 숙종의 추모제를 지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을 통해 경천사가 왕실에서 지은 원찰1) 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시대별로 석탑은 그 특징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통일신라 시대 이후로는 사각 평면을 기반으로 한 이중 기단의 삼층석탑이 석탑의 전형이 되었는데요.
그러니깐 그 예를 들자면.... 석가탑! 석가탑이 바로 통일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탑의 형식으로 볼 수 있겠네요.
반면, 고려 시대에는 정치 경제적 기반을 가진 지방의 호족들이 생겨남에 따라 탑의 모양도 지방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게다가 고려 말에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에 영향을 받은 탑들도 등장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경천사십층석탑'이 되겠습니다. 경천사십층석탑은 크게 기단부와 탑신부로 나누어지는데 1~3층은 기단부와 같이 아자형 평면에 20각을, 이후 4~10층은 사각 평면을 이룹니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탑이 3, 5, 7, 9층 등 홀수 층을 이루는 것과 달리 짝수인 10층인 점이 독특합니다.
기단부에는 «서유기»와 불교가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는데 부처, 보살, 인물, 용, 화초 등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는 것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탑신부에도 불교의 대표적인 법회장면이 형상화되어 있고, 면면마다 부처와 보살, 천부상 등이 빈틈없이 조각되어 있답니다.
ⓒ 『수난의 문화재 이를 지켜낸 인물이야기』, 문화재청 엮음
경천사십층석탑은 독특한 생김새 뿐만 아니라 재료도 남다릅니다.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대대로 단단한 화강암이 석탑의 재료였습니다. 그러나 경천사십층석탑은 회색 대리석을 사용했는데요,
대리석이 화강암보다 훨씬 무른 재료이기에 훨씬 더 정교한 조각이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경천사십층석탑은 이후 조선 초에 만들어진 국보 제2호 원각사지십층석탑에 영향을 줍니다.
자, 이제까지 경천사십층석탑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았는데요.
그럼, 이제 앞에서 언급된 '군민들의 맹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게요.
통감부가 설치된 1905년부터 1910년 전후, 일본인의 문화재 약탈은 극에 달했습니다.
당시 문화재 약탈자 중 가장 악랄한 사람으로 꼽히는 다나카 미쓰아키田中光顯(1843~1939)가 1097년 1월 20일 조선을 찾게 됩니다.
그가 조선에 온 이유는 1월 24일에 있을 대한제국 황태자(순종)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의 일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1904년 «한국건축조사보고»라는 책에서 본 경천사십층석탑의 모습뿐이었습니다. 그가 사절단으로 왔을 당시 경천사십층석탑을 빼내 가기 위해 기회를 엿보지만 31일 빈속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1907년 3월 한 무리의 일본인들이
"고종 황제가 기념으로 나에게 하사했다. 개성 근처의 절터에 있는 대리석탑을 도쿄의 우리 집 정원으로 운반하라."
라는 다나카의 명령을 앞세우고는 인근 주민들의 저항을 총검으로 위협하며 탑을 해체해 포장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일본인들의 불법 문화재 반출은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성을 갖은 유물을 지키려는 지역주민들의 맹세와 저항은 총검 앞에서 무력한 것이었지요.
그 이후 경천사십층석탑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질문이 우문(愚問)이죠? ^^;
우리는 결말을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압니다.
경천사십층석탑은 대한해협을 다시 건너옵니다.
이 탑이 바다를 건너올 수 있었던 것은 다나카의 사기 행각을 고발한 두 외국인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는데요.
그 주인공들은 바로 Ernest Thomas Bethell(1872~1909)과 Homer Bezalee Hulbert(1863~1949)랍니다.
두 사람은 언론을 통해서 다나카의 행각이 불법임을 밝히고 반환이 일본의 의무라고 주장합니다.
이후, 일본은 국내외 여론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더 이상 석탑의 반출을 부정할 수 없었고 1918년 드디어 경천사십층석탑은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답니다.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이 탑은 이미 심하게 훼손된 뒤였으며, 힘겹게 돌아온 서울에서 따뜻한 환영도 못 받고 광복 때까지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방치되다가 1959년 경복궁 내 전통공예관 앞에 세워집니다. 그리고 1962년 12월 국보로 지정되고, 1995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보존․복원 작업을 통해서 2004년 새것처럼 복원됩니다.
ⓒ 『수난의 문화재 이를 지켜낸 인물이야기』, 문화재청 엮음
경복궁 뜰에 있던 경천사십층석탑
일제시대, 고난을 겪은 수 많은 문화재 중 제가 '경천사십층석탑'을 이번 기사의 소재로 삼은 이유는 '개성군과 풍덕군 군민'들의 맹세 때문입니다. 문화재라는 개념이 당시 명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수 백년 된 유물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그들은 총검 앞에서 저항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계기로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문화재를 지킨다.
문화재를 관리한다.
문화재를 보호한다.
국가적 차원의 노력만으로 가능할까요? 혹은 국가적 차원의 노력만이 해답일까요?
아니라는 걸 우리는 선조들 때부터 알았습니다.
비록 그들이 그때는 지키지 못했지만 개성군민과 풍덕군민만 봐도 알수 있죠?!
문화재 관리 담당자 개인만이 관리책임을 질 수 없다는 거 우리는 모두 압니다.
문화재에 대한 자그마한 관심과 그 관심의 표현이 때로는 총검 앞에서 저항하는 것 보다 더 훌륭한 '지킴', '관리', '보호'가 될 수 있겠죠?!
1)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던 법당
▲제2기 문화재청 대학생 블로그기자단 이슬기 기자((lsk924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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