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 같이 단순히 감정이 아니다.
(감정이라면 우리들은 간단히 가질 수가 있다) 시는 경험이다.
한 편의 시를 쓰려면, 많은 도시를, 많은 사람들을, 많은 사물들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 동물, 새의 날으는 모습, 아침에 피는
꽃의 상태 등을, 알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미지의 토지에 있는 도로,
우연히 만난 사람들, 애당초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이별,
기억도 확실치 않은 먼 어린 시절, 자기도 알지 못하였던 즐거움이며, 마음먹고
아버지 어머니가 주는 것을 반항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들에 공상의
힘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사람 각자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서로 사랑하던 밤의 일,
분만하는 부인의 애끊는 절규. 어린애 침대에서 잠도 자질 못하고 창백하게,
그리고 잠들어버리는 부인들의 추억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땐, 들창을 열어 놓은 채,
계속적인 시끄러움이 들리는 방에서,
죽은 사람 곁에 앉아 있었던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만으로도 충분치 않다. 기억이 많이 있을 땐 잊어버리는
것도 필요하다. 그리하여 기억이 또 한번 떠 오를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억이 우리들의 내부에서 피가 되어
명확히 이름지울 수도 없게끔 되어버리든가,
이미 우리들 자신과 구별할 수도 없게끔
되어버릴 때 ―그야말로 어느 순간 시의 최초의 한마디가, 기억의
한가운데 나타나 빠져나가게 되는 것이다.
―R.M.릴케 「말테의 수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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