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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 전 백제 사리기 나왔다 [중앙일보]

윤여설 2007. 10. 25. 08:33
1400년 전 백제 사리기 나왔다 [중앙일보]
`정유년 2월 15일 … 사리 두 매가 신의 조화로 셋이 됐다`
왕흥사 터서 금·은·동 형태로 발견
백제 사찰인 충남 부여 왕흥사 터에서 나온 국내 최고(最古)의 사리기(左). 왼쪽부터 황금 사리병과 이를 담은 은제 사리외병, 청동사리함. 사리함 몸체에는 ‘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本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정유년 2월 15일 백제왕 창(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됐다’로 해석된다. [문화재청 제공]
충남 부여의 백제 왕흥사 터에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기(舍利器)가 나왔다. 백제 때 사리기 일습이 발굴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학계에선 신라에 비해 자료가 크게 부족한 백제사 연구에 획기적 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24일 충남 부여 왕흥사 터 발굴 현장에서 금병.은병.청동함 등 사리장엄구(舍利藏嚴具)를 공개했다. 1400여 년 전 것임에도 보존 상태가 거의 완벽했다. 황금사리병은 은으로 만든 사리 외병에 들어 있었으며, 은제사리병은 다시 청동사리함(높이 10.3㎝, 폭 7.9㎝)에 담긴 채로 출토됐다. 세 겹의 사리기 안에서 사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청동사리함 몸체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정유년 2월 15일 백제왕 창(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라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그동안 삼국사기 기록에 따라 600년(법왕 2년)에 축조되고 634년(무왕 35년)에 낙성된 걸로 알려졌던 왕흥사의 실제 축조 연대가 577년(위덕왕 24년)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확인됐다. 또 왕흥사가 위덕왕의 선왕인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진 절이라는 학계의 일반적 추론과 달리 죽은 아들을 위해 만든 절임이 밝혀졌다. 위덕왕이 597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낸 아좌(阿佐) 태자 외에 또 다른 왕자를 뒀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사리기는 목탑의 중심 기둥을 받치는 심초석(가로 100㎝, 세로 110㎝) 밑에 별도로 깔린 사리 안치용 넙적돌에 뚫린 작은 구멍(사리공) 안에 담겨 있었다. 이는 심초석에 사리공을 뚫은 뒤 기둥을 세우는 일반적인 방법과 달라 백제시대 사리 봉안수법과 목탑 축조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국립고궁박물관 김연수 전시홍보과장은 "금.은.동의 형태로 중첩된 완전한 사리기가 발견된 것, 지금까지 알려진 바 없는 독특한 사리장치의 안치방식, 사리 봉안 기록이 함께 발견된 것 등은 백제사 연구의 획기적 전환점"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하루빨리 문화재 지정 절차를 밟고 교과서 수록을 검토해야 한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한편 지진 같은 자연재해를 막기 위해 사리장치 주위에 묻은 진단구(眞壇具)에서는 8000여 개의 구슬과 목걸이, 팔찌, 비녀, 금귀고리, 옥류 등 다양한 유물이 확인됐다. 또 왕흥사 터의 중심축에서는 남북 방향으로 왕의 행차와 관련된 어도(御道) 추정 시설도 확인됐다. 남북 길이 62m, 동서 너비 13m다.

권근영 기자


☞◆사리장엄구, 사리기=사리장엄구는 부처의 유골인 사리를 담는 사리기부터 함께 납입되는 각종 공양품에 이르기까지 사리에서 탑으로 이어지는 모든 과정의 것을 말한다. 이중 사리기는 금.은.동.철.나무.돌 등 여러 재료로 만든다. 사리를 정성 들여 봉안하고자 안으로 갈수록 귀한 재질을 이용해 삼중.사중 등 여러 겹의 사리기에 사리를 안치했다.

< 2007년 10월 25일 중앙일보에서 옮겨 왔음>
2007.10.25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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