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인장사는 그 출발이 불행하게도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것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그 용도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백성을 다스리는 장이 전신(傳信)의 표시로써 사용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문헌의 기록이나 전해 내려오는 실물이 고려 시대 이전의 것으로는 너무나 빈약하여 고대 인장사의 어떤 체계를 세울 수가 없는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사실이다.
고려 시대만 하여도 국새 종류는 현존하는 것이 전무하고 여러 종류의 청동인(靑銅印)들 만이 남아 있다. 그 청동인들 조차도 문자미상이 대부분이여, 인의 종류에 따르는 용도나 사용 방법, 그리고, 사용자의 신분에 의하여 구분되었을 인의 제도나 형식이라든지 심지어 주조방법까지 자세히 알길이라고는 현재 남아 있는 자료만 가지고선 불가능한 상태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임진 왜란 이전까지는 유뮬과 기록 등 자료가 빈약하나, 임란 이후의 것은 논거를 통한 정리가 가능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18세기를 지나 19세기로 접어들면서 한국 예단에 일대 변혁을 전개시킨 추사 김정희 선생 생존당시의 전각계 모습이 본 논고에서 상론될 수 있게 되었음은 기쁜 일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삼국 시대 이전 인장의 모습은 한사군의 중심지였던 낙랑의 고분에서 출토된 것에서 그 형식과 내용을 엿볼 수 있다. 낙랑시대(B.C 108~A.D 314)의 印은 한대(漢代)의 인장제도가 그대로 전래된 것으로 독자적인 우리 민족의 것은 아니나, 그것이 우리 인장사의 연혁이 되고 있음은 사실이다.(그림1)의 인문은 [樂浪太守椽王光之印:낙랑태수연왕광지인],(그림2)는 [臣光:신광]이며 (그림3)는 [王光和印:왕광화인]이다. (그림1)의 <연>자는 관속명으로 아전이라는 뜻이나, (그림2)의 <신광>으로 봐서 한조(漢朝)가 당시 낙랑 태수 <왕광>에게 내려 준 인장으로 추측된다. (그림3)는 태수 <왕광>의 사인(私印)이다. 이것은 황양목(黃楊木)으로 된 木印인데 현재 그 행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림4)는 [魏率善韓伯長:위솔선한백장]은 1973년 서울 인사동 골동상회에서 발견된 것으로, 위가 변방의 이민족을 예속하고 그 信物로써 내려준 만이인(蠻夷印)의 일종이다. 인문의 '솔선(率善)'은 '수선(守善)'과 같은 뜻이며, '善'의 의미는 통치목적을 뜻하고, '韓'은 三韓 중의 일부족국가일 것이며, '백장(伯長)'은 백명(百名)의 군대로 조직된 부족의 대장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 印의 꼭지는 낙타모양인데,만이족印의 꼭지형식은 중원을 중심으로
①서남지방은 뱀의모양 ②남해지방은 소라모양 ③서방 및 북방은 낙타모양의 꼭지로 되어 있다.
이들 出土印들의 인문자체는 한대의 무전(繆篆:인의 크고 작음과 글자의 많고 적음을 맞추어 새기는 글자체)으로 자체가 확실한 白文(찍힌 글자가 백색)이며, 인의 형도 방형으로 표준적인 한인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유재호 화백의 블로그에서 가져왔음)
스산어브(유재호 화백 블로그)http://blog.daum.net/changheon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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