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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삼척, 고려와 조선의 교차전

윤여설 2007. 9. 29. 09:34
 

강원도 삼척, 고려와 조선의 교차전

 

두개의 공양왕릉

 

 한 사람의 무덤이 두 곳에 있다면 뭔가 사연이 있음이 분명하다. 고려 마지막왕인 공양왕. 그의 무덤은 두 곳인데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경기 고양시의 고려공양왕릉(高陵),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강원 삼척시의 공양왕릉이 그것이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은 1389년 원하지 않았던 자리에 즉위하여 3년만에 폐위되고 이곳 저곳을 떠밀려다니는 신세가 되어 1394년에 살해당한다. 그의 즉위, 폐위와 살해, 복위와 제향에 대하여 조선왕조실록을 따라가 보니 다음과 같았다.

(태조 총서 100) “우(禑)와 창(昌)은 본디 왕씨(王氏)가 아니므로 봉사(奉祀)하게 할 수가 없는데, 또 천자(天子)의 명령까지 있으니, 마땅히 거짓 임금을 폐하고 참임금을 새로 세워야 될 것이다. 정창군(定昌君) 요(瑤)는 신왕(神王)의 7대 손자로서 족속(族屬)이 가장 가까우니, 마땅히 세워야 될 것이다.”하고는, 공민왕의 정비궁(定妃宮)에 나아가서 정비의 말씀을 받들어 우왕은 강릉에 옮겨 두고, 창왕은 강화에 내쫓아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요(瑤)를 맞아서 왕으로 세우니, 이 분이 공양왕(恭讓王)이다.
(태조1년 07월 17일) (전략)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 등이 왕대비에게 아뢰었다. “지금 왕이 혼암(昏暗)하여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고 인심도 이미 떠나갔으므로, 사직과 백성의 주재자가 될 수 없으니 이를 폐하기를 청합니다. ”마침내 왕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공양왕을 폐하기로 일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남은(南誾)이 드디어 문하 평리(門下評理) 정희계(鄭熙啓)와 함께 교지를 가지고 북천동(北泉洞)의 시좌궁(時坐宮) 에 이르러 교지를 선포하니, 공양왕이 부복(俯伏)하고 명령을 듣고 말하기를,“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습니다. 내가 성품이 불민하여 사기(事機)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린 일이 없겠습니까?”하면서, 이내 울어 눈물이 두서너 줄기 흘러내리었다. 마침내 왕위를 물려주고 원주로 가니 (후략)
(태조3년 03월 17일) 정남진 등이 삼척에 이르러 공양군에게 전지하였다. “(중략) 군(君)은 비록 알지 못하지만, 일이 이 같은 지경에 이르러, 대간(臺諫)과 법관(法官)이 장소(章疏)에 연명하여 청하기를 12번이나 하였으되, 여러 날 동안 굳이 다투고,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이 또 글을 올려 간(諫)하므로, 내가 마지못하여 억지로 그 청을 따르게 되니, 군(君)은 이 사실을 잘 아시오.” 마침내 그를 교살(絞殺)하고 그 두 아들까지 교살하였다.
(태종16년 08월 05일) 고려의 끝 임금 공양군(恭讓君)을 봉하여 공양왕(恭讓王)으로 삼고, 사신을 보내어 능 아래에 치제(致祭)하였으니, 예조의 계문을 따른 것이었다.
(태종16년 09월 29일) 예조에서 공양왕의 능호를 내리고 그 비(妃)를 봉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세종19년 07월 17일) 안성군 청룡사에 봉안했던 공양왕의 어진(御眞)을 고양현 무덤 곁에 있는 암자에 이안(移安)하라고 명하였다.

  위 기록들을 보면 공양왕이 삼척에서 살해된 것은 분명하고, 조선조에 걸쳐 고양의 왕릉이 정식으로 인정되어져 온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시신은 어디에 있는 걸까. 삼척의 공양왕릉에 가면 4기의 무덤이 있다. 왕의 능과 두 왕자 석(奭)과 우(瑀)의 묘, 나머지 1기는 시녀 혹은 말의 무덤이라고 한다. 그 앞을 지나는 고개는 사래재(살해재)라 하니 피가 스민 듯하다.


 

 

고양의 공양왕릉은 능호를 고릉(高陵)이라 하며 공양왕과 왕비인 순비 노씨의 쌍릉이다. 무덤 앞에는 비석과 상석이 하나씩 놓여있고, 두 무덤 사이에는 석등과 석호(石虎)가, 무덤의 양쪽에는 문신과 무신상이 놓여있는데 조성 시에는 대군이었던 탓에 그 격식이 매우 조촐하다.

 

 

흔히 이야기되기로는 삼척에서 살해될 때 자객들은 숨진 공양왕의 머리를 가지고 갔다고 하여 아마도 삼척의 능에는 머리 없이 몸만이, 고양에는 머리만이 묻혀있을 것이라고도 하고, 고양의 능에는 아무 것도 묻혀있지 않다고도 한다. 발굴하여 시비를 가리자는 의견이 있기도 하나 무엇을 밝히기 위하여 이미 죽은 자의 능을 파헤쳐 생전의 비운에 한을 더한단 말인가. 두 개의 무덤에 스민 역사는 생생하기만 하다. 그 외에도 고양의 능 앞에 있는 연못에 빠져 자살했다는 설도 있고, 수행하던 장수에 의해 고성에 매장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하니 공양왕의 혼백은 어디에 머물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채 그 한이 깊고도 깊다.

전주이씨의 시조묘

 

 

공양왕의 한이 서린 삼척에는 국유(문화재청)인 지방문화재가 있으니 강원도 기념물 제43호인 준경묘(濬慶墓)ㆍ영경묘(永慶墓)이다.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자신의 4대를 왕으로 추존하는데 목조, 익조, 도조(탁조), 환조가 그들이다. 원래 전주이씨의 본향은 전주이나, 목조 이안사가 생전에 강릉도 삼척현으로 옮겨 거주하였으며 이 때 그를 따라 이사한 백성도 170여가에 이른다고 한다. 이 목조가 자신의 부모묘를 삼척에 모셨으니 준경묘는 목조의 아버지 양무(陽茂) 장군의 묘, 영경묘는 목조의 어머니 이씨의 묘이다.

 

조선왕조 개국에 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목조가 삼척에 와서 살던 중 부친의 상을 당하였다. 묘자리를 찾다 고목 밑에서 쉬고 있는데 지나가던 고승이 그 곳을 천하명당이라 하고 100마리의 소와 황금관(百牛金棺)으로 묘를 쓰면 후대에 왕이 난다고 예언하였다. 이안사가 이를 듣고 백(百)마리의 소는 흰(白) 소를 대신하고 황금관은 황금빛 귀리짚으로 대신하여 장사를 지냈다. 그 덕을 받아 훗날 5대손인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었다고 하니 이 곳 삼척은 조선왕조의 씨앗이 뿌려진 곳이라 하겠다. 이양무 이전의 전주이씨에 대한 세보가 남아있지 않아 지금도 전주이씨 종친회는 이 곳에서 제례를 올린다.
  지금도 울창하고 빼어난 송림으로 유명한 이곳의 소나무숲은 조선시대부터 그 명성이 높아 황장목이라 불리웠으며 경복궁 중수 시에는 자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삼척에서 엇갈리는 역사

조선왕조실록의 첫 기록은 목조 이안사로 시작한다. 그가 삼척으로 옮긴 것은 고려 고종 18년(1231) 전후쯤 되는데 삼척을 거쳐 의주, 중국의 남경 등으로 옮겨가므로 삼척에서 부친의 묘를 쓰게 된 것은 짧은 거주기간 동안에 일어난 일이라 하겠다. 그로부터 160여년 후 망국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새로운 나라 조선의 시조, 태조 이성계를 왕으로 만든 기운이 깃든 땅, 삼척에서 살해되어 생을 마감한다. 준경묘·영경묘에 묻힌 전주이씨의 기운이 고려왕조의 마지막 숨통을 조이고, 공양왕을 삼척으로 불러들여 살해당하게 했다고 하면 지나친 생각일 것이다.

  삼척 공양왕릉이 있는 언덕의 안쪽에는 궁촌리라는 마을이 있다. 공양왕의 아들에 연유한 궁촌리(宮村里)라 하고, 인근 활(弓)기리로 미루어보면 궁촌리(弓村里)일 수도 있는 이 마을의 이름은 고려왕조에 연유하는 것일 수도, 조선왕조에 연유하는 것일 수도 있다. 준경묘와 공양왕릉이 소재하는 삼척에서 조선의 태동과 고려의 종말이라는 역사가 교차하고 있다.

 

▷혁신인사기획관실 행정사무관 이종희

                                (문화재청에서 옮겨 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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