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묘지 다툼' 끝냈다
영조도 못
말린 파평 윤씨 - 청송 심씨 대립
두 문중은 2월 다시 만나 파평 윤씨측이 이장에 필요한 부지 2500여 평을 500m 정도 떨어진 청송 심씨 문중 땅 옆에 제공하기로 했다. 청송 심씨 측은 다음달 묘지를 이장할 예정이다. 두 문중 간 묘지 다툼은 조선시대 중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발단은 1614년 청송 심씨의 수장으로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1593~1662)이 윤관(?~1111) 장군 묘를 파헤치고 부친 등 일가의 묘를 잇따라 조성하며 비롯됐다. 파평 윤씨 일가는 이에 반발해 100여 년이 지난 1763년(영조 39년) 윤관 장군 묘를 되찾겠다며 심지원 묘를 일부 파헤쳤고 청송 심씨 일가가 이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며 오랜 다툼으로 이어져 왔다. 당시 임금이던 영조(1694~1776)는 고민 끝에 윤관 장군 묘와 영의정 심지원 묘를 그대로 받들도록 해 두 문중의 화해를 구했다. 그러나 파평 윤씨 일가가 이에 불복, "용미(龍尾:산소 뒷부분)를 누르는 심지원 묘를 이장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장살(매를 맞아 죽는)을 당하는 사태까지 빚어졌으며 이로 인해 두 문중 간 원한은 깊어져만 갔다. 현대에 이르러 두 문중 후손들은 원한을 풀기 위해 1969년 9월 화해각서를 교환하는 등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 노력했으나 번번이 최종 단계에서 실패했다가 최근 대타협을 이루게 됐다. 파평 윤씨 소정공파 윤도현(71)씨는 "조선조 명문가인 두 집안이 400년 가까이 조상의 묘소를 놓고 대립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이라고 판단해 화해했다"고 말했다. 청송 심씨 안효공파 심종복(67)씨는 "400년 가까이 끌어온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하게 돼 기쁘다"며 "두 문중 모두 조상을 올바로 섬기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더 이상 원한은 없다"고 말했다. 파평 윤씨는 성종비.중종비 등 조선시대 왕비 네 명을, 청송 심씨는 세종대왕비 등 조선시대 왕비 세 명을 각각 배출한 대표적인 외척 가문이다. 파주=전익진 기자<ijjeon@joongang.co.kr> ◆ 산송(山訟)=산소, 곧 묘지(분묘)에 관한 송사를 일컫는다. 조선 중기 이후 명당을 찾는 음택(陰宅) 풍수가 유행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에는 땅의 형세나 특성을 인간의 행복.불행과 연관시키는 풍수지리설이 특히 유행했으며, 산송은 이러한 명당과 깊은 관련이 있다. ◆ 윤관(? ~1111) 장군=고려 예종 2년(1107년) 여진 정벌군의 총책임을 맡아 17만 대군을 이끌고 나가 여진족을 물리쳤으며 이후 재침하는 여진을 평정했다. 그 후 여진의 계속된 침범을 막지 못하고 아홉 성을 여진에 돌려줬다. 여진의 침입을 막지 못한 책임으로 벼슬과 공신의 호를 삭탈당했다가 예종 5년(1110년) 복관됐다. 시호는 '문숙공'이다. ◆ 심지원(1593~1662)=조선 광해군 12년(1620년) 정시문과에 급제했다. 인조반정 이듬해인 1624년 검열에 기용되고,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수비하다 함락되자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조익 등과 의병을 모집했다. 1650년(효종 1년) 평안도관찰사, 이듬해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좌의정을 지내고 중추부영사(中樞府領使)가 됐다. 1657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와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중앙일보에서 퍼옴) |
2006.04.11 05:27 입력 / 2006.04.11 05:50 |
*참으로 잘한 일이다.
참배 때마다 가슴이 많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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