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및 문학행사

백석 탄생 100주년,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여설 2012. 2. 13.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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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탄생 100주년,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 테마분류 ㅣ 문화/예술
  • 등 록 일  ㅣ 2012-02-03
  • 관련자료 ㅣ 9개
눈이 푹푹 날리는 밤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혼자 쓸쓸히 소주를 마시던 시인 백석. 그는 영어와 러시아어에 능통했고 광복 이후에는 조만식의 통역 비서로 일했습니다. 백석은 신문물에 익숙한 모던보이였지만 시를 쓸 때면 평안도 사투리를 읊어 향토색 짙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문학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그의 작품은 교과서에 오르는 것은 물론 한국인의 애송시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2012년은 그가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문학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남긴 시인 백석에 대해 지식자원관리사업으로 구축된 '한국 전근대 인물정보 (http://people.aks.ac.kr)'와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http://yoksa.aks.ac.kr)', 그리고 '국가학술 DB (http://www.riss.kr)'의 도움을 받아 알아보겠습니다.



>> 백석(1912~1996) : 한국 문학을 밝힌 일등성

백석은 1912년 평안도 정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백영옥은 개화한 인물로 당시에는 드물게 사진을 찍고, 현상하는 기술을 지녔습니다. 어머니 이봉우는 서울사람으로 ‘밤이 들도록 바느질’을 하며 아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백석은 7살 되던 해 오산학교에 입학합니다. 오산학교는 이승훈이 지은 민족주의 학교로, 교장은 독립운동가 조만식이었습니다. 백석은 재학시절 같은 학교 스승이자 선배인 김억과 김소월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19살의 백석은 조선일보 작품 공모전에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돼 소설가가 됩니다. 문단에 데뷔한 1930년 백석은 조선일보 후원 장학생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1910년 평안북도 정주에 설립된 오산학교의 전경 (새창)
1910년 평안북도 정주에 설립된 오산학교의 전경
    출처: 한국독립운동사 종합지식정보                     ☞ 바로가기

일본에서 영문학을 배우고 돌아온 백석은 조선일보사에 입사해 외국문학 작품과 논문을 번역해 싣습니다. 이후 월간종합잡지인 「조광」의 편집을 맡습니다. 1936년 백석은 시집 『사슴』을 간행하며 시작활동을 본격화합니다. 조선일보사를 퇴사한 백석은 함경도에 위치한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일하며 러시아어를 익힙니다. 이후 조선일보에 재입사해 「여성」지의 편집을 맡고, 만주 등지를 오가며 시작활동을 이어갑니다.

백석의 시집 <사슴(1936)>의 본문 중 (새창)
 백석의 시집 <사슴(1936)>의 본문 중
    출처: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 바로가기

1945년 해방 후 백석은 고향 정주에 머물면서 글을 썼습니다. 동시에 조만식의 통역비서로 조선민주당의 일을 맡았고, 6.25전쟁 뒤에는 북한에 그대로 남았습니다. 북한에서의 작품 활동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이후 백석의 문학적 성과는 한국 문학사에서 오래도록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문학 동인이나 유파에도 소속되지 않고 독자적인 시작활동을 한 백석은 1996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 시인 백석의 또 다른 면모


> 잘 생기고 세련된 모던보이

백석은 뛰어난 문학적 재능은 물론이고, 수려한 외모로도 유명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김기림 시인은 “백석이 곱슬머리를 휘날리며 걸을 때면 거리가 절로 환해졌다”고 전합니다. 백석은 머리를 모두 뒤로 넘긴 올백형 헤어스타일을 고집했고, 일반 양복보다 서너 배 비싼 양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당시에 백석은 요즘의 아이돌을 뛰어넘는 인기가 있었습니다. 남성들은 양복을 사 입는 등 ‘백석 따라잡기’에 열을 올렸습니다. 작사가 백운학은 이런 풍경을 ‘빈대떡 신사’란 노래에 담았습니다. 백운학은 “양복 입은 신사가 요리집 문앞에서 매를 맞는데…”란 가사로 백석의 외모만을 쫓는 이들을 비판했습니다.
 
백석 - 청산학원 3학년 시절(좌), 강단에서의 모습(우) (새창)
백석 - 청산학원 3학년 시절(좌), 강단에서의 모습(우)


> 결벽증이 있던 시인

백석은 결벽증이 있었습니다. 문을 닫을 때 손잡이를 만지지 않고 문 뒤 쪽에서 밀어서 닫았다고 합니다. 전차를 타면 손잡이를 절대 맨손으로 잡지 않았고, 손수건으로 감싼 다음에 잡거나 아예 잡지 않았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걸음을 멈춰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모습을 곧잘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시집 『사슴』을 만들면서 한지를 한 장 한 장 낱장으로 인쇄했을 때도 손에 물기가 있거나 침을 바르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을 만큼 백석은 청결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책의 읽은 부분을 표시하려 책장을 접는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백석은 잠을 잘 때면 항상 새 신문지를 깔고 누웠다고 합니다.



> 로맨티스트

시인 백석과 자야(김영한)의 사랑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26살의 영생고보 교사 백석은 함흥관에서 만난 자야에게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엔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라고 속삭입니다. 두 사람은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리고 사랑을 키워갑니다. 자야는 백석에게 넥타이를 선물합니다. 백석의 시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에서는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다니는 백석의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지낼 때 백석은 그 유명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씁니다. 하지만 백석의 부모는 조선권번 출신의 기생인 자야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한 집안의 장남인 백석은 부모의 요구에 못이겨 결혼식을 올렸지만, 신혼생활은 길지 않았고 이내 자야를 찾았습니다.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로 떠나자고 청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합니다. 백석은 혼자서 만주로 길을 떠납니다. 집안의 반대, 봉건적인 인식, 그리고 남북분단으로 두 사람은 영영 볼 수 없는 사이가 됐습니다.



>> 시인 백석의 작품과 문학적 의의


> 시에 새긴 백석의 민족사랑

백석은 자신의 고향인 평안북도 방언을 시어로 적극 활용했습니다. 이는 우리 민족의 언어 영토를 문학적으로 넓히는 시도로 해석됩니다.


「여우난곬족」 (일부) -백석

명절날 나는 엄마아배 따라 우리 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 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 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걸이는 하로에 베 한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新里고무 고무의 딸李女 작은李女 (중략)// 이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뫃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 1935년 『조광』에 발표
 

이 시가 발표된 1930년대는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이 시행되던 때였습니다. 백석은 「여우난곬족」에서 어릴 적 명절 모습을 기억하며 여러 친척들이 함께 모여 보낸 시간을 표현합니다. ‘숨굴막질’ ‘쥐잡이’ 등 우리민족 고유의 놀이를 등장시켜 사라져가는 풍경을 시로 기록했습니다.
 

백석은 “만주라는 넓은 벌판에 가 시 백 편을 가지고 오리라”는 다짐처럼 자신의 시에 북방의 정신을 불어넣고자 했습니다.
 

「서행시초 2 북신」 (일부) -백석

거리에서는 모밀내가 낫다// 부처를 위하는 정갈한 노친네의 내음새 가튼 모밀내가 낫다 (중략)// 나는 문득 가슴에 뜨끈한 것을 느끼며 소수림왕을 생각한다 광개토대왕을 생각한다

- 1939년 조선일보에 발표
 

제목의 ‘북신’은 평안북도 북신현면을 가리키는 지명입니다. 백석은 국수를 먹으며 고구려의 왕을 떠올립니다. 고구려 시대는 전쟁에 대한 대비가 철저했고, 기마문화가 발달했습니다. 이에 따라 짧은 시간에 만들 수 있는 국수를 즐겨먹었습니다. 따라서 백석은 국수라는 음식을 보며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던 우리민족을 떠올린 것입니다.
 


> ‘백석의 시는 마음을 달래는 요리’

돌나물 김치, 백설기, 매감탕, 도토리묵, 송구떡, 국수 등 백석의 시에는 110여 종에 달하는 음식이 등장합니다. 일본 유학과 경성 생활로 신문물에 익숙했을 텐데, 백석은 외국 음식이나 고급 요리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백석이 시에서 언급한 음식은 서민적이고 토속적인 음식입니다.
 

「야반」-백석

토방에 승냥이같은 강아지가 앉은 집// 부엌으론 무럭무럭 하이얀김이 난다.// 자정도 활신 지났는데/ 닭을잡고 모밀국수를 눌은다고 한다// 어늬 山옆에선 캥캥 여우가운다.

- 1938년 『조광』에 발표
 

백석의 시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음식은 국수입니다. 특히 모밀국수는 그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으로 함경도 여행 후 발표한 기행시에서는 연작 네 편 중 세 편에서 모밀국수가 나옵니다. 백석의 시에서 ‘국수’는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먹는 음식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음식이란 키워드로 백석의 시를 분석한 소래섭 교수는 이에 대해 사소하지만 질긴 것의 생명력이 백석의 마음을 끌었을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백석은 여행길에 오를 때면 그 지역의 음식을 시에 담아내곤 했습니다. 이를 통해 백석은 일제 식민지 아래서 우리 음식의 의미가 어떻게 변질되어가고 있는지 통찰하고, 시에 등장하는 음식을 통해 당대의 지배문화에 대한 저항을 드러냈습니다. 동시에 잊혀져가는 우리 고유의 전통을 되살리고자 노력했습니다.


 
>> 백석이 사랑하고, 백석을 사랑한 사람들


> 백석, 김소월의 계승자이자 극복자

한국 현대시인의 대명사 김소월. 그는 민족의 한과 서러움을 시에 남기고 32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김소월과 백석은 같은 평안북도 출신으로, 오산학교 선후배 사이입니다. 또한 두 사람은 김억이라는 같은 스승 아래서 문학을 배웠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백석은 김소월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창작 노트를 보고 이상한 흥분을 느꼈다고 할 만큼 김소월을 각별하게 생각했습니다. 백석은 김소월이 죽은 지 1년 후 조선일보와 「조광」을 통해 시를 발표합니다.

월간종합잡지 <조광> 표지 (새창)
월간종합잡지 <조광> 표지
    출처: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 바로가기

김소월이 활동하던 당시 시인들은 일어와 영어, 러시아어를 시어로 사용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하지만 김소월은 이런 분위기에 동참하지 않고 우리민족 고유의 말로 시를 씁니다. 김소월의 시를 통해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깊이 느낀 백석은 김소월의 작품 세계를 이어받습니다. 백석은 김소월을 계승한 것에서 머무르지 않습니다. 김소월의 시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체념한다면, 백석의 시는 슬픔을 느끼고 절망하지만 희망을 찾습니다. 이에 대해 문학평론가 신범순은 백석이 “김소월의 진정한 계승자이자 극복자”라고 말 합니다.
 
서울 용산구 남산공원에 위치한 소월시비 (새창)
서울 용산구 남산공원에 위치한 소월시비
    출처: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 바로가기


> 백석의 제자, 아동문학가 강소천

백석이 함흥에서 교사로 일할 때 강소천은 그에게 영어를 배우고, 문학적 자극을 받았습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였지만 두 사람은 3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는데, 이는 강소천이 만학도였기 때문입니다. 공부할 당시 강소천은 문학에만 몰두하느라 다른 과목을 낙제해 졸업이 늦어졌고, 백석은 그런 강소천을 아껴 지도했다고 합니다. 강소천은 스승의 지도와 격려 속에 소설을 시작으로 시와 동시, 동요를 지었습니다.

강소천이 『호박꽃 초롱』이란 동시집을 내자, 백석은 「‘호박꽃 초롱’ 서시」를 씁니다. 시집이 출간된 1941년, 일제는 우리말 사용을 금지하고 이를 어긴 사람을 체포했습니다. 위험한 시국임에도 두 사람은 자신이 한글을 쓰는 조선인임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아동문학가 강소천은 “우리나라 말을 후세에 이어가게 하는 방법은 좋은 아동문학 작품을 남기는 것”이란 스승의 말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백석을 존경하고 사랑한 제자 강소천은 분단 후 북에 머문 스승을 그리며 ‘스승의 은혜’를 노래로 만들었습니다.
 
강소천의 동시집 <호박꽃 초롱(1941)> 본문 (새창)
강소천의 동시집 <호박꽃 초롱(194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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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의 시집을 늘 갖고 다닌 윤동주

일제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소망을 노래한 시인 윤동주. 그는 일본 유학 시절 항일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돼 건강악화로 28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윤동주는 살아 있을 때 백석의 시를 좋아했다고 전해집니다. 한정판으로 100부를 발행한 백석의 첫 시집 『사슴』은 2원이었는데, 당시 말 한 필이 5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비싼 가격이었습니다. 윤동주는 백석의 시집을 구하지 못해 도서관에서 베껴 쓴 필사본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고 합니다.
 

「힌 바람벽이 있어」 (일부) -백석

오늘저녁 이 좁다란 방의 힌 바람벽에/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중략)/ 이 힌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중략)/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 1941년『문장』에 발표
 

「별 헤는 밤」 (일부)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중략)/ 별 하나의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의 시를 살펴보면 백석의 영향력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윤동주, 그리고 백석. 두 사람은 모두 우리말과 우리민족을 사랑한 시인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 2012년 백석 탄생 100주년

다양한 기법과 형식의 시로 현대시의 미학을 깊이 있게 창조한 시인 백석. 분단 이후 북한에 머문 탓에 우리 문학사에 등장하지 못하다 1988년 납·월북 문인 해금 조치 이후 백석에 대한 연구가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1999년 ‘백석문학상’(고 김영한의 기부로 제정됨)이 생긴 이후 백석에 대한 기념사업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올해 백석 탄생 100주년을 맞아 문학계에서는 백석의 삶과 그의 작품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활발합니다. 한국시학회는 4월 ‘백석과 그의 시대’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할 예정입니다. 한국비평학회는 5월에 백석의 작품세계에 대한 학술행사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 한국작가회의와 대산문화재단도 백석의 삶과 문학을 집중 조명할 예정입니다. 더불어 출판계에서는 백석의 시와 소설을 망라한 전집 출간을 추진 중입니다.





※참고문헌 및 사이트

ㅇ 『백석평전』김영진, 미다스북스, 2011
ㅇ 『백석의 맛』소래섭, 프로네시스, 2009
ㅇ 『백석을 만나다』이숭원, 태학사, 2008
- 국가지식포털 객원 기자 조은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