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 (1세) 9월23일(음력 8월20일)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부 김연창(金演昌)과 모 박세창(朴世昌)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 본명은 해경(海卿). 본관은 강릉.
*1912 (3세) 부모를 떠나 아들이 없던 백부 김연필(金演弼)댁에서 24세까지성장.
5세에서 7세까지 백부로부터 한문을 수확함
*1917 (8세)4월, 누상동에 있는 신명학교(新明學校) 제1학년에 입학. 이때부터 그림에 재질 보임.
*1921 (12세)3월, 신명학교 4년 졸업. 백부의 교육열에 힘입어 그해 4월, 조선불교중앙교무원 경영의 동광(東光)학교에 입학
*1924 (15세) 동광학교가 보성고보(普成高普)로 병합. 동교 4학년에 편입학. 이 해에 교내 미술전람회에 유화「풍경」입상.
*1926 (17세)3월 5일, 보성고보 5학년 졸업. 그해 4월 동숭동에 있는 경성(京城)고등공업학교 건축과 제1학년에 입학. 미술에의 집착을 가지고 보낸 고공 1여년동안 회람지『난파선』의 편집을 주도. 삽화와 시를 발표.
*1929 (20세)3월 경성고공 3년에 졸업.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 11월, 관방(官房) 회계과 영선계로 옮긴 후 12월, 조선 건축회지『조선과 건축』회지 소화5년도 표지도안 현상모집에 1등과 3등으로 당선.
*1931 (22세) 7월 처녀시「이상한 가역반응」, 「파편의 경치」,「BOITEUX·BOITEUSE」, 「공복」 8월, 일문시 「오감도」 10월,「삼차각 설계도」를 각각 『조선과 건축』에 발표. 이 무렵 곱추화가 구본웅(具本雄)을 알게 됨. 서양화 「자화상」을『선전(鮮展)』에 출품, 입선. 이 해에 백부 사망.
*1932 (23세) 조선과 건축』회지 소화 7도 표지도안 현상모집에서 제4석에 당선. 비구(比久)란 익명으로 시「지도의 암실」을『조선』에 발표. 7월 이상(李箱)이란 필명으로 된 시「건축무한 육면각체」를 발표
*1933 (24세)3월, 심한 각혈로 총독부 기수직을 사임. 통인동 백부의 유산을 정리하여 효자동에 집을 얻고, 21년만에 친부모 형제들을 옮겨옴. 백모는 계동으로 이사. 요양차간 배천 온천에 서 기생 금홍과 알게됨. 7월, 서울 종로 1가에 다방 「제비」를 개업. 동거생활 시작. 7월부터 국문으로 시 발표.「이런 시」,「꽃나무」,「1933. 6. 1」을 (가톨릭 청년),「거울」발표.
*1934 (25세)구인회에 입회 본격적인 문학활동 시작. <매일신보>에 시 '보통기념'을 발표. 시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발표, 물의가 일어 10회 연재후 중단.(원래는 20편). 8월, 신문소설「소설가 구보(九甫)씨의 1일」이라는 작품에 하융(河戎)이라는 화명(畵名)으로 삽화를 그림. 시 「소영위제」(중앙)를 발표.
*1935 (26세)시「지비(紙婢)」(가톨릭청년),「정식」(조선중앙일보)' 수필「신촌여정」(매일신보)을 발표. 9월 경영난으로 다방 「제비」를 폐문하고 금홍과 헤어짐. 인사동에 카페 「쓰루(鶴)」을 인수해 경영했으나 얼마 못가 실패, 다방「69」를 설계하나 양도하고, 다방 「무기(麥)」를 설계, 양도. 계속된 경영 실패로 그의 가족은 신당동 빈민촌으로 이사. 성천, 인천 등지로 여행.
*1936 (27세)3월, 창문사에서 구인회 동인지『시와 소설』을 편집 1집만 내고 창문사 나옴. 「지비 1·2·3」(중앙),「역단」(가톨릭청년)을 발표. 수필「선망률도」(조광)「조춘점묘」(매일신보),「가외가전」,「여상」,「낙수」, 「Epigram」,「매상」등을 발표.
단편「지주회시」,「날개」등을 발표. 전부터 알았던 이화여전 출신 변동림과 결혼. 새로운 재기를 위하여 일본 동경으로 떠남(음력 9월3일). 그 곳에서 「공포의 기록」,「종생기」,「권태」,「슬픈 이야기」 , 「환시기」등을 씀.
시「위독」(조선일보), 수필「행복」(여성), 「추등잡필」,「1세기식」(삼사문학)등 발표. 소설「봉별기」(여성),「동해」(조광), 동화「황소와 도깨비」(매일신보)등을 발표.
*1937 (28세)2월, 사상 불온혐의로 일본 경찰에 유치. 3월, 건강이 악화되어 보석으로 출감. 4월17일 오전 4시,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객사. 향년 만 26년7개월. 그 전날(16일) 부모와 조모 사망. 아내 변동림에 의해 유해는 화장되어 환국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후일 유실. 5월에 「종생기」(조광),「권태」 발표.
*1939 「실락원」(조광),「실화」(문장)등 유고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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