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에 백제의 왕이 살았다고?
- 왕궁리 유적 발굴 성과 발표회
지난 11월 25일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익산 왕궁리 유적에 대한 2010년도 발굴조사 성과를 공개했습니다. 왕궁리 유적은 남북 길이 490여m, 동서길이 240여m에 이르고 백제시대의 장방형 석축 성벽과 서북편에는 생활 관련 시설과 대형 화장실, 정원, 공방지 등의 궁성관련 유적이 발견되는 등의 고고학적 성과로 백제 말기인 무왕시대에 백제의 수도가 사비에서 익산으로 옮겨졌다는 이른바 익산천도설에 힘을 실어주기도 하였는데요, 특히 이곳 왕궁리에서 발견된 <수부>명 인장와는 왕도인 부여 부소산성에서만 확인되는 것이어서 왕궁리 유적의 위상이 왕도 부여에 준하는 것이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왕궁리 유적 항공 사진- 1989년부터 연차발굴 중인 익산 왕궁리 유적은 백제 말기에 백제의 수도가 부여에서 익산으로 천도하였다는 익산천도설의 중심에 있는 곳이다. ⓒ 문화재청>
<수부명 인장와- 수도였던 수소산성에서만 수부명 인장와가 출토된 사례로 볼 때,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수부명 인장와가 출토된 사실은 당시 익산의 위상이 어느정도였는지 가늠하게 한다.>
‘익산의 왕궁리’에서 ‘수도 익산’으로 스케일 확대
왕궁리 유적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 의해 1989년 연차발굴 조사가 시작된 이후로 왕궁으로 내부 시설, 공간 구획 등을 밝힐 수 있는 괄목할 만한 고고학적 성과를 올렸지만 백제의 왕이 살았을 공간의 스케일을 ‘익산의 왕궁리’로 볼 것이 아니라 왕이 살았고 왕의 정치 무대였던 ‘수도로서 익산’을 설명하기에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2010년도의 발굴조사 ‘익산의 왕궁리’의 스케일을 확대시키는 성과를 보였습니다.
왕궁리 유적의 확장조사의 결과 왕궁리 내부 정원 북편에 후원(後園)이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고, 구체적으로 구불구불하거나 휘어진 물길로 경계 지어진 공간에 물길을 감상하기 위한 시설과 물길을 건너기 위한 다리, 구릉 정상의 건물지와 부속시설 등이 차례로 발견 되었습니다. 이러한 물길은 구릉의 평탄한 대지에 위치한 왕궁리의 치수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백제시대 왕궁의 후원이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후원 공간 배치도- 왕궁리 유적의 북쪽 후원은 구불구불하거나 휘어진 물길을 경계로 하고 있다. 이것은 구릉의 평탄한 대지위에 입지한 왕궁리 유적의 치수와 관련된 것으로 보여진다. ⓒ 문화재청>
또한 주목해 볼만한 성과로 왕궁리 유적의 북문지(북쪽문이있던 자리)가 새롭게 발견이 된 것인데요. 이번 조사결과 북쪽문이 발견 됨에 따라 왕궁리 유적에는 동, 서, 남, 북 모두에 걸쳐 문지가 확인되었습니다. 이 역시 왕궁리 유적이 백제 무왕시대 당시 왕궁으로서 어느정도의 스케일을 가지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척도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북문지 남쪽에 환수구 내에 교량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문화재청>
특히 동벽에 수직으로 연결되어 만들어진 돌을 잇댄 시설이나 기와를 양쪽으로 면을 맞춰 쌓은 시설이 발견 되었는데요, 이것은 향후 성벽과 관련된 여러 부속시설과 관계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부분이구요, 그것과 관련한 여러 논의를 가능하게 해주는 성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왕이 정치력을 행사하는 수도는 왕궁의 건설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가 왕궁과 관련한 도로망과 성곽 등을 구성하는 특징을 보이는데요, 이러한 시설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그동안 지적되었던 왕궁리의 스케일이 ‘익산 속의 왕궁리’일 뿐만 아니라 ‘백제의 수도 익산’이라는 스케일 확장 논의를 가능케 해 줄 것으로 보입니다.
<동벽 내측의 석렬시설 모습- 동벽 내측에 직교하는 석렬시설과 와적시설은 주변시설과의 관계 등을 고려하여 그 기능에 대한 후속 조사가 필요하다. ⓒ 문화재청>
한편 북벽에서는 <대관관사> 명문와가 발견되었구요. 5층석탑 북동편의 민묘 이장 지점에서는 중국청자편이 새로 발굴 되었는데요. 이것은 왕궁리의 당시 위상과 건설 연대 설정, 중국과의 교류 관계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꼽을 수 있겠습니다. 백제와 같은 고대사 연구의 경우 전해 내려오는 기록이 부족한 현실이기 때문에 이러한 고고학적 유물들은 수수께끼를 풀어주는 중요한 단서가 여겨지게 됩니다.
<5층 석탑 북동편 민묘 이장지점에서 발견된 중국 청자편 ⓒ 문화재청>
<대관관사- 수부명 인장와와 마찬가지로 왕궁리의 위상을 나타내 준다. ⓒ 문화재청>
현재 익산은 경주·부여·공주와 함께 고도보존에관한특별법에 의해서 고도 지역으로 지정되어 역사도시로서 정체성을 유지하며 발전할 수 있는 보존과 개발의 정책을 수립하여 관리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번 발굴 조사의 성과로 현재 학계에서 주목하고 있는 백제의 수도 익산에 관한 논의는 다양하게 그리고 더 과학적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입니다. 숨겨져 있던 역사적 사실이 어떻게 밝혀 질 수 있을지, 또 그 해답을 고고학적 발굴이 어떻게 제시할 수 있을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일 입니다.<가져온 곳:http://blog.daum.net/munhwajaecheong/17918803 >
▲ 제2기 문화재청 대학생 블로그기자단 박홍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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