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1

[스크랩] 박수근 작품전

윤여설 2010. 12. 14. 17:28

 

 

 

 

 

박수근 연보
1914년 2월 21일. 강원도 양구군 양구면의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
1932년 독학으로 선전입선
1932년 - 44년 평안남도청 근무, 평양에서 <주호회> 창립
1945년 금성여중 미술 교사
1952년 6.25 전쟁 중 월남
1953년 - 64년 <국전>에 출품하여 수회 특선
<국전> 추천 작가 및 심사위원 역임
195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동서 미술전> 초대 출품
1958년 <한국회화전>(미국 뉴욕 월드 하우스 화랑) 초대 출품
1959년 조선일보사 주최 <현대작가전> 초대 출품
1965년 5월 6일 별세
1980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추서
1985년 20주기 기념전(현대화랑)

 

 

청년시절의 박수근(1930년대 후반)

 

 

 

우리에게 친숙하고 한국의 밀레라 불리우는 박수근님의 작품들중 우선 대표적인것만 요번기회에

 올리고 그외 다수의 작품들은 연이어서,가능한 작품 시기별로 분류하여올릴 계획입니다. 

그러면 작가의 예술적 성숙과정이 한눈에 들어와서 보는 재미를 더 할것 같습니다.
박수근님은 1914년 강원도 양구(楊口) 에서 태어나셔서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하여

 화강암 마티에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완성 하였습니다. 
회백색을 주로 하여 단조로우면서 한국적 주제를 서민적 감각으로 다룬 점이
특색이라 할 수 있겠죠.


그는 살아생전에는 전쟁 통에 사랑하는 가족과의 생이별을 하고
부두 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겨우 꾸리는등 많은 고생을 했지만,천재적 예술가의 생애에서 흔히

보여지듯 사후인 현재 그의 작품들은 한국 화단을 대표하며 최고가에 거래 되고 있으며

외국에서도 대단한 호평을 받고있답니다.



노상


"하느님 저도 이 다음에 커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 주옵소서"
박수근의 12세 무렵 소망이라했다. 김병종의 <화첩기행2>이란 책을 보면 화가.
박수근을 '선한 이웃을 그린 한국의 밀레'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말은 참으로 그럴 듯한 말이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부족한 말이다.




노상의 사람들


그 이유는 화풍이 그와 달라서만이 아니라 '박수근' 그 자신 역시
몹시도 선한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박수근은 12세 때
밀레의 만종을 보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며 자신도 커서 저렇게
훌륭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될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골목안


그래서인지 박수근의 그림들을 보면 어딘가에서 할아버지의 넓고 아득한 품에 안겨
잠든 채 집까지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의 인생이 너무나 가난하여 끼니를 걱정해야 할 지경이었던

 적도 여러번이었음에도 그의 그림에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었던 할아버지의 품격과 함께 천진난만한
손주의 목소리가 듬뿍듬뿍 묻어나는 느낌을 주체할 수가 없다.





春日


그의 젊은 시절 생활상 과 평소 가족 과의 인간적 관계를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는편지 한통을 먼저 소개하면

"실례인 줄 알면서도 이 편지를 보내오니 용서하시고 끝까지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는 양구군 양구면 정림리 부농가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는 고운 옷에 갓신
만 신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내가 일곱살 되던 해 아버지의 광산 사업이 실패하고 물에
전답이 떠내려가서 우리집은 그만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나무와 두 여인


5세 때 서당에 다녔고 7세 때 보통학교에 입학해서 나는 보통학교밖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어머니께서 유방암으로 오래 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셔서 동생들과 아버지를 어머니 대신

돌봐야 했기에 고학이라도 해서 미술학교를 다니려 하던 꿈은 그만 깨져 버렸습니다.



나무와 여인


나는 춘천과 서울로 다니면서 그림공부를 독학했습니다.
지금까지 다섯번 선전에 입선을 했습니다. 선전(鮮展)에 처음 처녀 입선한 것은

내가 18세 때였습니다.




아기업은 소녀

지금까지 춘천에서 그림공부를 하다 부모님이 계신 집에 오니 부모님께서 윗집
처녀에게 장가들라고 권하셨습니다. 나는 여러번 거절했습니다.
내가 더 성공해서 결혼할 생각이었으나 부모님께서 하도 권하셔서 나는 당신에
대해 내동생 원근(元根)이와 동네 사람들에게 알아보았습니다.




소녀

일전에 당신이 우리 어머니와 빨래하러 같이 갔을 때
어머니 점심을 가져간다는 핑계로 빨래터에 가서 당신을
자세히 보고 아내로 맞아들이려고 마음으로 결정했습니다.




일하는 여인


나는 그림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론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굴비


귀여운 당신을 아내로 맞이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겠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꿈꾸어 오던 내 아내에 대한 여성상은 당신같이 소박하고 순진하고 고전미를 지닌
여성이었는데 당신을 꼭 나의 배필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복숭아


나는 나혼자 당신을 모델로 그림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나의 이 숨김없는 고백을 들으시고, 당신도 당신의 심정을 솔직히
적어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귀로

이 연애편지는 1939년 겨울 춘천에서 고향 양구로 돌아온 그가 자신의 아내가 된
김복순(金福順) 여사에게 보낸 것이다. 그러나 이 연애편지는 처녀의 아버지에게
발각되고 처녀는 춘천의 의사집과 급하게 혼례를 추진하게 된다.

 이에 낙담한 그는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누웠고,

이에 놀란 박수근의 부친은 그 처녀의 집에 가서 담판을 짓게 된다.

김복순 여사의 부친은 혼례를 승낙하며 소리내어 울었다고 한다.

그렇게 되어 화가 박수근은 김복순이라는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게 된다.

그녀는 박수근의 처음이며 마지막인 유일한 모델이었고,

 사랑이었고 생애의 모든 것이었다.




귀로


박수근의 그림은 거의 독학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앞서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의 부친은 광산사업을 실패하고 잇따라 전답마저 잃어 그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받도록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만큼은 보통학교 시절부터 이미 인정을
받아 일본인 교장 선생은 소년 박수근의 집까지 찾아와서 그에게 그림 연필과
도화지를 사주며 열심히 그림을 그리라고 당부할 정도였다고 한다.





마을풍경


그의 16세 때 일본인 교장 선생은 격려와 함께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출품해 볼 것을 그에게 권유하였고, 그는 1932년 11회 선전에서 <봄이 오다>로
입선의 영광을 안게 된다. 그러나 그무렵 그의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몸져눕게
되고 결국 그의 나이 21세 때(1935년) 세상을 떠나고 만다.




나물캐는여인


박수근은 이에 크게 낙담하여 실의에 빠지지만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도
미술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간신히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기 시작할 무렵
그는 위아랫집으로 살던 김복순 여사와 결혼한다. 신혼초에 직장 생활을 위해
본의아니게 별거생활을 하게 된 두 사람은 매일같이 편지를 써서 보냈다.





맷돌질 하는 여인


이 두 사람의 편지 왕래는 우체부가 투덜댈 정도였다. 남편 박수근은 평양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편지에 그곳이 몹시 춥다고 쓰자 아내는 자신의 털실 목도리를
풀어 남편의 텔 스웨터를 짜려고 했으나 실이 모자라 조끼를 짜보냈고 남편은
그에 감격하여 다시 편지를 보냈다.





모란

화가 박수근의 생애를 살펴보면 문득문득 이 분의 살아온 행적들이 나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그도 아니면 가까운 주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선한 이웃
어른의 모습들과 중첩됨을 느낄 수 있다. 가족을 건사하고, 가난 속에서도
아이들이 구김살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늘 신경 써주는 자상한 아버지.
안으로는 세상의 모든 풍상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막아주면서 정작 당신 자신은
바깥 세상의 온갖 풍상들을 몸으로 겪어내는 아버지의 모습.





풍경

박수근 세대는 세 차례의 전쟁을 겪은 세대이다.
어려서는 식민치하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궁핍을, 해방 이후에는 민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을 몸소 체험해야 했고, 나중에 나이 들어서는 그들의 자식이
베트남 전쟁이란 외국의 전쟁에 파병되는 경험을 했다.





초가마을

실제로 박수근의 자식이 월남전에 파병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연배 세대가 경험한
세 차례의 전쟁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겪어내야 했을 무수한
상처들 중 가장 두드러진 체험이였을 것이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 무렵,
박수근은 동생 동근을 병으로 잃고, 전쟁이 격화되면서 미군의 폭격이 평양에
이르자 1944년엔 자신을 제외한 아내와 어린 남매를 금성의 본가로 내려보낸다.

그들 가족이 전쟁으로 인해 맞이하는 첫 번째 이산이었다. 해방된 후인
1948년엔 맏아들인 '성소'를 '뇌염'으로 잃고 만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전쟁이 일어나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박수근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월남하던 중 다시 가족과 뿔뿔이 헤어지는 이산의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전쟁의 혼란 속에 그의 셋째 아들 '성인'이 죽는다.
박수근의 많은 작품에서 여성은 일하는 모습으로 많이 그려지고 있는데
반해서 남성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정체되어 있고, 웅크린 듯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당시의 시대 분위기와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상처받은 아버지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추측된다.

 

 


강변


 

 


☆박수근의 독특한 마티에르 기법에 대하여

화가는 화강암의 질감과 색조를 무척 좋아 했던것 같다.그래서 의도적으로 재현하려고

노력했는데  그의 돌에 대한 관심은 다음의 글에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우리나라의 옛 석탑, 석불 같은 데서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끼며 이것을 조형화에 도입코자 애쓰고 있다"고 했다.

 

 


귀가


그리하여 그는 오래된 이끼낀 듯한 화강암의 질감을 연상케 하는 마티에르를 창안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대상의 평면화를 성공적으로 이룩하게 된 것이다.
(「박수근」열화당)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화가의 아호는 미석(美石)으로 글자 그대로
아름다운 돌이다. 조선미전 도록에 한 번 실린 적이 있을 뿐 별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얼마나 돌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림 그리는 소녀들

 

 


박수근의 화강암 질감표현 과정


이러한 화강석의 질감을 내기 위해 화가는 여러 번의 힘든 과정을 거쳤는데,
윤범모 씨가 이러한 과정을 박수근의 아들 박성남씨의 증언을 기초로 분석하였다.
<박수근의 예술세계와 민족미의 구현>이라는 논문에서 이러한 제작과정을 분석한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대화


첫째, 캔버스의 바닥 면에 기름을 섞지 않고 뻑뻑한 체로 물감을 칠한다.
둘째, 캔버스의 결을 따라 가로 세로를 번갈아 가며 제소를 바르지 않은

마대로된 캔버스에 올의 우둘투둘한 요철에 의해 질감이

나타날 때까지 전체적으로 칠한다.
이 때 어두운 색깔로 10~15회 바탕칠을 반복한다.

셋째, 반복적으로 칠해진 물감은 큰 덩어리를 이루면서 마티에르(질감)을

형성하는데 마른 후에 나이프로 크게 뭉쳐진 부분을 긁어냄으로써

본래의 고유색이 마모된 상태로 남는다.
넷째, 화강암의 깊이 있고 묵직함을 표현하기 위해 암갈색으로 반복적으로

붓질을 하여 바탕 처리를 한다.

다섯째, 그렇게 된 바탕 위에 선으로 소재를 그리고 색을 칠한다.
여섯째, 마티엘 간의 부조화 부분은 十자 모양의 붓질을 다시 하면서 마무리한다.

 

 


들길

 

 


시장


그는 실제로 화강석을 옆에다 두고 그 질감을 관찰해 가며 작품 속에 이를 재현해
보고자 노력했는데 그가 이처럼 화강암에 애정을 가진 것은 한국의 야산에서는
어디서나 쉽게 눈에 띄는 돌이며 수많은 조각이나 암각화의 재료로써 민족적정서
를 담고있는 소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귀한 대리석도 아닌 화강암이라는 흔한
돌멩이는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소박한 모습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09년 찬불가요 대상곡 

 

출처 : 시조시인 함세린 시조문학 [청풍명월 연가]
글쓴이 : 無曲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