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보의 알기 쉬운 詩창작교실·연재 13회 ■
당신도 좋은 詩를 쓸 수 있다
임 보 (시인·전 충북대 교수)
[제36신]
산문과 산문시의 차이는 무엇인가
로메다 님,
질문하신 대로 최근에 발표된 어떤 산문시들을 보면 산문과의 한계가 모
호한 것도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길이만 일반 산문에 비해 짧을 뿐이지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산문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산문시도
시로 불리려면 분명 일반 산문과는 다른 변별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어야
하겠지요.
다음의 글이 산문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현대시를 외형률의 유무와 행의 표기 형태를 기준으로 따져 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가) 운문형식이며 행 구분이 있는 시
나) 산문형식이며 행 구분이 있는 시
다) 운문형식이며 행 구분이 없는 시
라) 산문형식이며 행 구분이 없는 시
가)와 다)는 운율적인 요소 곧 율격이나 압운 같은 외형률을 지닌 시이고
나)와 라)는 그런 외형률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가)는 우리가 흔히 만나는
일반적인 자유시다. 나)는 문체로 볼 때 산문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행 구
분이 되어 있다. 김수영金洙暎의「만용에게」라든지 서정주徐廷柱의 후기 기행
시 같은 작품들이 이에 해당한다. 다)는 운율을 지닌 작품이지만 산문처럼
행 구분이 되어 있지 않는 경우다. 「장미·4」등 박두진朴斗鎭의 초기 작품들
에서 쉽게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라)는 운율도 없으면서 행 구분도 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이상李箱의「지비紙碑」같은 작품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가)와 나)를 분행자유시分行自由詩, 다)와 라)를 비분행자유시非分行自由詩라고
구분해 명명키로 한다. 산문시는 바로 이 비분행자유시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산문시는 자유시의 하위 개념이다.
유무 등 그 내적 구조로 따져 본다면 나)가 다)보다 더 산문성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지만, 산문시를 분별하는 기준을 내적 특성으로 잡는다
는 것은 여간 곤혹스런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산문성과 비산문성의 한계를
따지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문시는 그 외형적인 형태를 기
준으로 규정하는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산문시는 분행 의식이 없이 산문처럼 잇대어 쓴 자유시’라
고 정의한다. 한용운韓龍雲의 자유시들은 행이 산문처럼 길지만 산문시의 범
주에서 제외된다. 왜냐하면 한용운의 시는 분행 의식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용운의 시처럼 그렇게 행이 긴 시들을 장행시長行詩라고 달리
부르고자 한다.
그런데 분행 의식을 기준으로 산문시를 규정해 놓고 보아도 역시 문제는
없지 않다. 라)의 산문시와 산문(짧은 길이의)을 어떻게 구분하느냐가 문제
가 아닐 수 없다. 즉 산문시와 산문의 한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그것
이 산문이 아닌 시로 불릴 수 있는 변별성은 무엇인가.
산문시와 산문의 차이를 논하는 것은 결국 시詩와 비시非詩를 따지는 것
과 궤를 같이 한다. 나는 바람직한 시란‘시정신이 시적 장치를 통해 표현
된 글’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러면 시정신이란 무엇이며 시적 장치는 어
떤 것인가가 또한 문제로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무릇 모든 글은 작자의 소망한 바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시 또한 예외
는 아니다. 그런데 시 속에 담긴 시인의 소망은 보통인의 일상적인 것과는
다르다고 본다. 훌륭한 시작품들 속에 서려 있는 시인의 소망은 세속적인 것
이 아니라 격이 높은 것이다. 말하자면 승화된 소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
는 이를 시정신이라고 부른다. 시정신은 진眞, 선善, 미美, 염결廉潔, 지조志操를
소중히 생각하는 초연한 선비정신과 뿌리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시가 되도록 표현하는 기법 곧 시적 장치 역시 단순한 것이 아니어
서 이를 몇 가지로 요약해서 제시하기란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굳이 지적을 해 보자면, 감춤[상징象徵, 우의寓意, 전이轉移, persona(가화
자)], 불림[과장誇張, 역설逆說, 비유比喩] 그리고 꾸밈[(운율韻律, 대우對偶, 아어
雅語] 등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들을 한마디로‘엄살’이라는 말로
집약해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시는 시인의 승화된 소망(시정신)이
엄살스럽게 표현된 짧은 글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리라.
산문시도 그것이 바람직한 시가 되기 위해서는 시정신이 시적 장치를 통
해 표현된 글이어야만 한다.
伐木丁丁(벌목정정) 이랬거니 아람도리 큰솔이 베허짐즉도 하이 골이 울
어 맹아리 소리 찌르릉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묏새도 울지
않어 깊은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달려 흰 뜻은 한밤 이골을 걸음이랸다? 웃절 중이 여섯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히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
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듸랸다 차
고 兀然(올연)히 슬픔도 꿈도 없이 長壽山(장수산) 속 겨울 한밤내─
- 정지용鄭芝溶「장수산長壽山·1」전문
「장수산·1」에 담긴 정지용의 소망은 무엇인가.
무구적요無垢寂寥한 자연 속에 들어 세속적인 시름을 씻어 버리고 청정한
마음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리라. 그러니 이 작품에 담긴 시정신은 ‘친자연
親自然구평정求平靜’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일상적인 욕망을 넘어선 승
화된 정신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또한 이 작품에서의 주된 시적 장치는
대구의 조화로운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맨 앞의 ‘∼하이’로 종결되는 두 문
장이 대우의 관계에 있고, 짐승인‘다람쥐’와 새인 ‘묏새’의 관계가 또한
그러하며, ‘달’과 ‘중’을 서술하는 두 문장 역시 그러하다. 또한 의도적인
의고체擬古體의 구사로 우아하고 장중한 맛을 살리고 있다.
「장수산·1」은 일반적인 산문과는 달리 시정신과 그런 대로 시적 장치를
지닌, 시의 자격을 갖춘 글이라고 할 만하다.
산문시는 운율을 거부한 시로 잘못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산문시도 율격
이나 압운 등을 얼마든지 담을 수 있고, 그런 외형률이 아니더라도 내재율
에 실려 표현되는 것이 이상적이다. 여타의 시적 장치들 역시 산문시 속에
어떻게 적절히 구사되느냐에 따라
그 글을 시의 반열에 올려놓기고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한다. 산문시는
외형상 산문의 형태를 지니고 있을 뿐이지 결코 시에 미달한 글이어서는
곤란하다.
-「 산문시散文詩」『엄살의시학』pp.85~88
로메다 님,
서구에서의 산문시는 정형시에 대한 반발로 19c 중엽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에 의해 시도되었습니다. 그러니 분행 자유시보다 먼저 출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현대시에 있어서도 1910년대 분행 자유시와 거의 동
시에 산문시가 출현합니다. 김억, 주요한에 이어 정지용, 백석, 서정주 등
을 거치면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어떤 산문시는 시
로서의 위상을 상실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된 중요한 원인은 첫째,
시와 산문의 경계를 허물려는 해체시의 의도적인 경향과, 둘째, 시를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는 시인의 나태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의 경우는
의도적인 시도니까 어찌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둘째의 경우는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산문시도 시로 불리기 원한다면 보통의 자유시와 마찬가지로
시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지극히 원초적인 사실을 잊고 있기 때
문입니다.
로메다 님,
어떤 이는 형태만 보고 분행 자유시보다 산문시 쓰기가 더 쉬울 거라 생
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산문시를 쓰는 것이 더 까다롭습니다. 왜냐하면
분행하지 않고 산문 형태 속에 시적 요소들을 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건
필을 빕니다.
[제37신]
신춘문예에 응모했다고요?
로메다 님,
신춘문예에 응모했다고요? 잘 하셨습니다.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해
마지않습니다.
세상에 글을 발표하기 위해서는 공인된 문인의 자격을 얻는 것이 유리하
지요. 잘 아시겠지만 우리나라에서 문인으로 등단하는 길은 몇 가지가 있
습니다. 문예지에 추천을 받는다든지, 문학단체나 신문사들이 주관하는 공
모에서 당선된다든지, 개인 작품집을 간행한다든지…. 그 가운데서도 가장
화려하게 등단하는 길이 ‘신춘문예’인 것 같습니다.
매년 신년호 지상을 수놓은 자랑스런 당선자들의 얼굴을 보노라면 흐뭇
한 생각이 듭니다.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이 그렇거늘 본인들이야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수천 대 일의 관문을 뚫고 당선의 영광을 안았으니 각
광을 받을 만도 하지요. 글공부하는 사람치고 신춘문예를 꿈꾸어 보지 않
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로메다 님,
투고하신 것은 잘 하셨습니다. 그러나 설령 입선되지 못한다 해도 너무
실망해 하지 말기 바랍니다. 수천 명 가운데서 선택을 얻는다는 것은 마치
낙타가 바늘귀를 뚫고 들어가는 일처럼 어렵고 어려운 일입니다.
언젠가 내 중학시절 체육 선생님에 관해 얘기한 적이 있지요? 시골 중학
교에서 어린 나에게 처음으로 시에의 눈을 뜨게 해 주신 그분 말입니다. 내
가 매일 일기장에 열심히 시랍시고 글을 썼다는 얘기도 했던가요? 그 글들
가운데 괜찮다고 생각되는 몇 편을 골라 잡지사에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학원』이라는 청소년 잡지의 독자문예란에 투고한 것입니다.
달이 지나도 감감 무소식, 내가 보낸 작품이 영 실리지 않았습니다.
실망한 나는 그 체육 선생님을 찾아가 하소연을 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제 작품을 보시고 칭찬을 해 주셨는데, 잡지에서
는 실어주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 헛 칭찬을 해주신 것 아닌가요?”
그러자 선생님께서 웃으시면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여기 쟁반에 여러 가지 종류의 과일이 놓여있다고 치자. 사과, 배, 감,
귤, 포도… 등 많이 있구나. 그 중에 하나만 골라 먹으라고 하면 너는 어떤
걸 집겠니?“
“그야 제가 좋아하는 사과를 집지요.”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만을 골라야만 하는 경우, 단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달콤한 감을 선
택하고, 신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새콤한 귤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선택받는 것은 선택한 사람의 기호에 좌우되는 것이지 과일의 우열 문제와
는 크게 상관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아무리 좋은 과일도 선택자의
기호에 맞지 않으면 선택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서 마지막 하시는 말씀이
“내가 선자였다면 네 작품을 골랐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선택받는 일에
너무 연연해하지 말고 열심히 쓰도록 해라!”
로메다 님,
당선된 작품이 응모작품들 가운데 최상의 작품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
다. 선자가 바뀌면 당선작도 바뀔 것이 거의 틀림없습니다. 예술 작품에 대
한 평가란 객관적 기준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니까 상품의 가치처
럼 차별화하여 평가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한두 사람의 선자들에 의
해 평가된다는 것은 지극히 무모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 작품을
놓고 우열을 따지는 공모 제도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고료를 내걸고 시행되는 신춘문예 제도는 문학을 지망하는 청년
들에게 자극제로 작용하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마치 로또가 부
를 꿈꾸는 가난한 서민들의 마음에 위안이 되듯이 말입니다.
문예지를 통해 등단하는 것도 한결같지 않습니다. 권위 있는 문예지인
경우엔 그 제한된 등용의 관문을 뚫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싸구려 문예지들은 매번 신인들을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양산해 내기도 합
니다. 등단하기 쉽다고 해서 그런 하류 잡지들에 선뜻 몸을 내미는 것도 신
중해야 합니다. 등단한 뒤의 처신이 개운치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보통
사람에게 출생지出生地가 따라붙듯이 문인에겐 늘 출신지出身誌가 달라붙습
니다. 하기야 작품만 잘 쓴다면 별 문제될 일도 아니긴 합니다만?.
로메다 님,
신춘문예도, 권위 있는 문예지를 통한 데뷔도 여의치 않다면 개인 문집
을 만들어 등단하기를 권하고 싶군요. 특정 잡지에 겨우 몇 편의 작품으로
인정받아 등단하는 것보다 수십 편의 작품이 실린 문집을 세상에 내놓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떳떳한 등단입니까? 물론 작품집을 엮는 데는 출판사
선정이며 출판비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
는 언젠가는 치러야할 과제이니까 그것을 미리 치른다고 생각하면 크게 억
울해 할 것도 없습니다.
로메다 님,
언젠가는 사람들이 품에 안고 싶어하는 예쁜 시집을 가지십시오. 가능하
다면 그 시집의 표지를 당신이 손수 고안도 하고, 당신이 존경하는 기성문
인의 짧은 글을 얻어 책의 머리에 놓아도 좋을 것입니다. 그날이 기대처럼
쉬 오지 않더라도 너무 조급해 하지 말기 바랍니다. 더디 올수록 당신에겐
좋은 작품들이 쌓이게 될 것이니까요. 문운을 빕니다.
[제38신]
시의 네 단계
로메다 님,
신춘문예에 당선의 영예를 누리지 못했군요. 좀 실망이야 되겠지만 너무
애석해 할 것도 없습니다. 지난번에 내가 얘기한 것처럼 문예작품의 평가
는 선자選者의 주관에 좌우됩니다. 그러니 당선은 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
각하기 바랍니다. 너무 일찍 등단하지 않은 것이 어쩌면 당신을 위한 축복
일 수도 있습니다. 약관의 나이로 화려하게 등단하는 문인들 치고 후세에
좋은 작품을 남긴 경우는 별로 흔치 않습니다. 조기 등단이 오히려 자만을
길러 글공부를 등한케 하기 때문인가 봅니다.
어떤 시인은 데뷔작품이 그의 대표작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처럼 불
행한 일은 없습니다.
이런 형상은 등단 무렵 작품에 쏟았던 치열한 정성을 등단 후에는 쏟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등단의 시기가 늦어질수록
글에 대한 단련의 기회를 더 많이 갖게 되고, 장차 큰 작품을 쓸 수 있는 능
력을 갖추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로메다 님,
등단에 관한 얘기는 이제 이만하고 오늘은 시의 네 단계에 관해 언급하
고자 합니다. 시를 평생의 과업으로 밀고 나가려면 보다 넓은 시야로 시를
바라다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시의 길을 더 깊고 멀리 나아갈 수 있습니
다. 시에 몸을 담고 살아가는 데도 다음의 네 단계가 있습니다.
시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기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한 작품의 생성
은 그 시인이 지니고 있는 언어 운용의 능력뿐만 아니라, 그 시인의 총체적
인 정신 활동(미의식, 비평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 탐구의식 등)의 결과인
데, 이러한 요인들의 우열을 객관적으로 가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
서 작품에 대한 모든 평가는 따지고 보면 평가자의 주관적인 기호에 근거
하기 마련이다.
소위 J.C.랜섬이 내세운 ‘형이상의 시’(metaphysical poetry)나 (랜섬은
시를 대상을 노래한 사물시(physical poetry)와 생각과 감정을 노래한 관
념시(platonic poetry)로 양분한 뒤, 이 둘을 통합하는 형이상의 시를 이상
적으로 생각했음.) I.A.리차즈가 제시한 ‘포괄의 시’(inclusive poetry)라는
것도 결국 그들의 개인적 가치관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한다.(리차즈는
‘포괄의 시’와 ‘배제의 시’로 구분하여 ‘포괄의 시’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데 이에 관한 논의는 따로 할 것임.)
역대 동양적 시평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종영鍾嶸이나 사공도司空圖등의
‘시품설詩品說’들(이들은 시의 품격을 24시풍 등 다양하게 분류하고 있으나
객관성이 없는 것들임) 역시 인상주의 범주 내에서 시도된 것에 불과하다.
어떠한 경우라도 시의 평가에 대한 객관적 논의가 설득력을 얻기는 어렵다.
그러나 작품의 우열을 따지는 문제와는 달리, 한 시인의 생애를 통해서
변모해 가는 작품의 경향을 몇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는 일은 결코 무의미
하지만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개의 식물들이 잎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잎을 떨구는 과정
을 계절에 좇아 자연스럽게 밟아 가듯이 시인들 역시 그들 생명의 역정에
따라 세계[대상]를 보는 태도도 변모해 간다. 이 변모의 역정을 나는 다음
의 네 단계로 설정해 보고자 한다.
* 제1기 모방模倣의 단계
주체[自我]의 밖에 존재하는 대상들 곧 세계와 현실을 긍정적으로 인식하
며 수용하는 단계다. 대상의 모방描寫, 현실의 재현再現이 중요시된다. 따라
서 감각의 기능 및 관찰력이 주도하고 수사법상 비유가 빛을 발한다. 리얼
리즘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세계다.
* 제2기 탐색探索의 단계
현상에 대한 회의, 현세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한다. 감추어진 본질의 세
계에 대한 탐색, 이상 세계의 추구, 나아가서는 피안彼岸에의 염원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대상 자체보다는 대상을 움직이는 어떤 원리眞理를 터득,
묘오妙悟에 이르고자 한다. 감각보다는 직관, 투시적 혜안이 주도한다. 수사
상 상징법이 원용되고 사조상 상징주의에 닿아 있다.
* 제3기 창안創案의 단계
역시 기존의 세계에 대한 부정 정신에 근거한다. 그러나 강한 주체의식
의 발동으로 새로운 세계를 모색한다.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탈
세계라는 입장에서 보면 파괴적인 것으로 보이나 대상들 간의 새로운 관계
를 모색하는 면에서 보면 순수한 창조 지향이라고 할 수 있다. 회화에서의
추상 내지는 비구상의 단계에 해당된다. 대상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자
유를 꿈꾼다. 환상적인 상상력이 주도한다. 폭력적 병치가 사물을 얽는다.
이른 바 무의미의 시라는 것이 이 단계에 속하는 대표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 제4기 방치放置의 단계
자아와 세계에 대한 긍정으로 되돌아오는 단계다. 제1, 2단계는 자아보다
는 세계가, 제3단계는 세계보다는 자아가 주도를 하지만 여기서는 자아와
세계가 조화를 이루는, 아니 세계 속에 자아가 스며들어 하나가 되는 물아
일체物我一體의 단계다. 달리 말하면 무욕청정無慾淸淨, 귀의자연歸依自然의 경
지라고 할 수 있다. 유유자적悠悠自適, 무애불기無碍不羈하여 드디어는 탈기교
脫技巧, 치졸稚拙, 무법無法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말하자면 시의 열반경涅槃境
이라 할 수 있으리라. 이곳이 바로 선인先人문사들이 선망했던 이상적인 경
지다.
서두에서 나는 시 작품의 객관적인 평가의 불가함을 거론했다. 이 네 단
계에 속한 작품들의 우열도 물론 일괄적으로 논의할 수 없다. 독자들과의
관계까지를 따지면 더더욱 그렇다. 대상을 생동감 있게 그린 사물시가 놀라
운 감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자연의 오묘한 섭리를 노래한 형이상학적
인 시가 우리를 깊은 사색의 바다 속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혹은 기발한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기이하고 낯선 시세계가 신선한 충격으로 와 닿기
도 하고, 마치 어린이의 그림처럼 순진무구純眞無垢한 치졸한 작품이 혼탁한
우리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정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니 어느 한 단계의 작품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역시 설득력이 없
다. 그렇기는 하지만 작품 아닌 시인의 문제는 논의의 대상으로 남는다. 시
인의 역정歷程이라는 것 말이다.
앞에서 나는 시인의 역정을 설명하면서 그 예로 식물의 생태를 들춘 바
있다. 그런데 식물의 생태가 한결같지 않은 것처럼 (어떤 놈은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우기도 하고, 어떤 놈은 봄 아닌 가을에 꽃을 만들기도 한다) 시인
들의 역정 역시 앞에 제시한 네 단계를 한결같이 밟아 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시인은 제1의 단계에서 평생 안주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시인은 제2
의 단계에 깊이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시인들은 제3 혹은 제4의 단계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제4의 단계에 이른 시인들이 그렇게 흔치 않다는 사실이다.
이는 제4의 단계가 시인의 연치年齒와 무관치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달관達觀
에 이르는 수심修心의 결과에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는 훌륭한 작품에 대한 기대 못지않게 훌륭한 시인에 대한 기대도
크다. 어쩌면 전자보다 오히려 후자에 대한 비중이 더 클지도 모른다. 한
시인의 초연한 삶을 통해 우리들의 궁극적인 염원인 어떻게 살 것인가의
그 지난至難한 문제의 매듭이 혹 풀릴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리라.
시가 이 세상을 구원하기는 힘겨울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시대의 사
표로 시인을 설정한다. 그래도 아직은 그들이 순수하기 때문이다. 시인 중
에서도 네 번째 방치의 단계에 이른 시인들을 이상으로 삼는다. 시인을 단
순한 장인匠人으로 보지 않고 구도인求道人으로 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 시의네단계」『엄살의시학』pp.155~158
로메다 님,
오늘도 골치 아픈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군요. 이 얘기도 따지고 보면 내
주관적인 가치관에 근거한 것이니까 너무 마음에 두지 않아도 상관없습니
다. 다만 시의 먼 길을 내다보면서 앞날을 설계할 때 참고로 하시기 바랍니
다. 건투를 빕니다.
-월간《우리詩》3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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