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비(神道碑)에 대한 고찰(考察)
<출처-1> 와혈(窩穴)/이완규 저/예문서원 2001년
석비는 크게 세부분으로 나뉘어 진다. 비석을 받치는 대좌(臺座), 비문을 새기는 비신(碑身), 그리고 비신을 덮는 개석(蓋石) 또는 관석(冠石)이다. 개석(蓋石)을 뿔 없는 용(龍) 즉 ‘이무기’로 장식할 경우 ‘이수년 수(首)’라 한다. 대좌(臺座)는 거북 모양을 조각한 귀부(龜趺)와 네모지게 깍은 방부(方趺)가 대종을 이루는데 어느 것이나 윗부분에 비신(碑身)을 끼우는 홈을 판다. 대좌(臺座)로는 주로 귀부를 많이 쓰이는데, 이는 거북의 천년 수명처럼 비문을 영구히 전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
비신(碑身)은 대개 직육면체로 깎아 세운다. 앞면이 비양(碑陽), 뒷면이 비음(碑陰)이다. 비문(碑文)은 음양면(陰陽面) 모두 새기는데 앞면에는 주로 관직과 신분을 큰 글씨로 새기고, 뒷면에는 행적과 출신 내력을 새기는 것이 보통이다. 비신(碑身)의 상단부나 이수(螭首)에 새기는 비의 명칭이 ‘제액(題額)’이다. 전서(篆書)로 쓰면 전액(篆額), 예서(隸書)로 쓰면 예액(隸額)인데, 전액(篆額)이 가장 흔하다. 그리고 제액(題額)을 가로로 새기면 횡액(橫額), 세로로 새기면 종액(從額)이라 하는데, 횡액(橫額)이 압도적으로 많다.
신도비(神道碑)는 거의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같춘 석비형식이지만, 일반 묘비는 귀부와 관석이 흔하다. 관석(冠石)의 형태는 크게 보아 두 가지다. 비신과 분리되어 있는 분리형과 비신과 한 몸이 된 일체형이 그것이다. 어느 경우든 관석(冠石)의 형태와 조각 수법은 매우 다양하다.
묘비(墓碑)는 신도비(神道碑)와 묘갈(墓碣)로 대별된다. 신도비는 3품 이상의 고관만이 세울 수 있으며 형식은 석비와 유사하다. 크기는 대체로 2미터 이상이며 대단한 정성과 노력을 들이기 때문에 명품이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신도비는 그 숫자마저 파악되니 않은 상태이다. 안동지역에 있는 신도비 가운데는 아마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신도비일 것이다.
묘갈(墓碣)은 일반적인 묘비(墓碑)를 지칭한다. 비(碑)는 돌을 네모지게 깎아서 만든 것이고 갈(喝)은 자연석의 한 면만을 깎아서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비(碑)는 비신의 윗부분이 네모지고, 갈(碣)은 석물의 위쪽이 둥그스름하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며 묘갈(墓碣)도 비처럼 되어 있는 경우도 흔하다. 다만 규모가 작고 장식이 소박하다. 또한 신도비와 구별하기 위하여, 그리고 선비의 검박(儉薄)함을 나타내기 위해 묘비(墓碑)를 묘비라고 부르기 보다는 주로 묘갈(墓碣)이라고 부른다.
묘비(墓碑)의 일차적인 기능은 죽은 자의 행적을 기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이의 일생을 간략하게 기록한 비문이 있다. 돌에 글씨를 새기면 오래도록 지속되기 때문에 비문을 짓고 새겨서 비를 세우는 데는 여러 가지 조심해야 할 사항이 있다.
그 첫째는, 비문의 주인공이 후인에게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널리 보면,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의 일생에서 배울 점이 없지 않을 것이나, 진정으로 사표(師表)가 되는 삶을 산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조선의 선비 중에는 자신을 기리는 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遺言)을 한 사람이 많다. 어설픈 후손이 어설프게 조상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는 것은 대남없이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둘째는 비문(碑文)에 거짓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다 잘 보이게 하기 위하여 사실을 과장하고 왜곡하거나 얺는 사실을 날조해서는 안 된다.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는 법이니 거짓된 비문은 오리려 집안의 수치가 된다. 때문에 비문(碑文)은 아무나 쓸 수가 없고 또 써주지도 않는다. 비문(碑文)의 끝에 반드시 들어가는 찬자(撰者)의 이름은 곧 자신의 양심과 학식을 후인에게 검증받는 것과 같다. 어떻게 아무에게나, 아무렇게나 쓸 수 있겠는가.
셋째는 비(碑)에 품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품격은 오직 정성에서만 나온다. 아무리 작고 하찮은 물건이라도 만드는 이의 정성이 들어 있지 않으면 그 물건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실력은 정성 속에서 익어가는 법이다. 요즘의 물건들이 조잡한 것은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정성의 문제이다. 옛 사람들이 세워 둔 묘갈(墓碣)과 현재의 묘비(墓碑)들과 비교할 때 마다 불쾌한 감정을 감추기 힘든 것은, 비석(碑石)에 지금 사람들의 후안무치한 뻔뻔함만이 잔뜩 묻어 있기 때문이다. 크다고 해서 그리고 까만 돌이라고 해서 결코 좋은 비(碑)는 아니다.
묘갈(墓碣)의 비문(碑文)은 거의 앞부분에 서(序)가 있고 끝에 명(銘)이 있다. 서(序)는 죽은 이의 출신과 행적을 간략하게 ‘서술(敍述)’한 것이며, 명(銘)은 칭송의 ‘노래’이다. 명(銘)을 짓기 위하여 죽은 이의 행적을 덧붙인 것이 서문(序文)이다. 그러므로 서문(序文)과 명문(銘文)은 확실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출처-2> 장례의 역사/박태호 저/서해문집 2006년
신도비는 죽은 사람의 평생사적(平生事蹟)을 기록하여 묘 앞에 세운 비 가운데 하나로서, 중국에서 한나라 때 처음 세웠다는 설이 있다. 처음에는 비에 새기기를 ‘모제(某帝)’ 또는 ‘모관신도지비(某官神道之碑)’라고만 하였다. 신도비를 묘의 동남쪽에 세우게 된 것은 풍수지리상 묘의 동남쪽을 귀신이 다니는 길, 즉 신도(神道) 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신도비가 태조의 건원릉 신도비와 세종의 영릉 신도비 등 초기의 왕릉에만 있으며, 왕릉에도 신도비를 세웠으나 문종 때 이를 금지시켰기 때문에 세종의 신도비가 마지막이 되었다. 이후 국왕의 사적은 실록에 기록된다는 주장에 따라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다. 반면 많은 사대부들은 신도비를 세웠는데, 실제 관직이나 사후에 추증된 관직으로 정2품 이상인 경우에 세울 수 있었다. 비의 크기를 보면 높이가 4척부터 7-8척되는 큰비까지 있어 웅장한 자태를 보이고 있다.
조선 후기로 가면 신도비의 비제(碑題)도 길어지고 비문도 장황하게 길어져서, 비양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측변을 지나 비음까지 이어진 경우도 곧잘 나타난다. 이는 조선 후기 가문의 성세를 돋보이고자 하던 추세에서 나타난 결과이다. 게다가 비문의 내용 가운데에는 과장된 것들이 흔해 역사적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도 많다.
<출처-3> 조선의 왕실과 외척/박영규 저/김영사 2003년
이자춘의 무덤은 함흥 동쪽 귀주동에 마련되었으며, 신도비의 비명은 이색이 썼다가(舊神道碑), 나중에 환조로 추존되고 나서 정총이 다시 지었다(新神道碑). 능호는 정릉이다.
태조의 능은 양주 남쪽 검암산(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마련되었고, 능의 신도비 비문은 권근이 지었으며, 비음기(碑陰記)는 변계량이 지었다. 능호는 건원릉이다.
조선 초에는 신도비를 세워 왕의 업적을 새겼는데 문종 이후에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다.
왕의 시신이 매장된 뒤에는 위폐를 혼전에 모시는데, 그로부터 3년이 지나면 종묘에 옮겨 모신다.
세종의 능은 원래 헌릉(서울 강남구 내곡동) 서쪽산에 조성되었다가 예종 원년인 1469년 3월에 경기도 여주 서북편 성산으로 옮겨졌다. 이승소가 묘지(墓誌)를 짓고, 윤희가 행장을 지었으며, 정인지와 김조가 신도비(神道碑)의 글을 지었으며, 글씨는 안평대군이 썼다.
<출처-4 > 풍수지리 교과서/고제희 저/문예마당 2009년
고인의 평생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神道碑)는 주로 묘 동남방의 길가에 세워 길손들을 묘로 안내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풍수가에 따르면 동남방이 신도(神道)이고, 조선시대에는 종2품 이상의 고관의 묘에만 설치가 허락되었다. 비문은 학자나 문장가가 찬(撰), 명필이 서(書), 각수가 각(刻)하여 찬자(撰者)로 미루어 보아 고인의 위업과 공훈 그리고 학문과 덕행을 알도록 하였다.
전통 묘제에서 고인의 업적을 기록한 비는 신도비가 유일하며, 묘앞에 세우는 묘비에는 고인의 업적은 기록되지 않고, 다만 묘의 주인이 누군가 하는 정도만 알 수 있게 기록된다.
신도비는 지대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옥개석을 덮는 형태인데, 지대석은 화강암 재질로서 거북 형태의 귀부(龜趺)와 장방형이 있다.
비신은 대개 오석(烏石)을 쓰며, 옥개석은 화강암 재질로 용무늬의 이수(螭首)나 팔작지붕의 형태가 있다. 귀부의 지대석 위에는 이수로 옥개석을 치장하고, 장방형 지대석 위에는 팔작지붕의 옥개석을 얹는 것이 보통이다. 지대석 위의 비신에 이수를 얹은 것도 있다.
<출처-5> 한국사 인물 이야기/윤희진 저/책과 함께 2006년
이순신(李舜臣)의 묘에는 보물로 지정된 김육이 지은 신도비와 함께 21대 왕 정조가 직접 비문을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우리나라 역사상에 왕이 신하의 묘에 비문(碑文)을 지은 것은 오직 여기 한 군데 뿐이다.
<출처-6> 조선의 문인이 걸어온 길/이종호 저/한길사 2004년
신도비의 경우 일반적으로 당대의 문장가, 즉 홍문관 대제학에게 청하는 것이 상례이다. 묘갈명은 대체로 3품직 이하의 관료를 지낸 양반층에게 사용되는 것이고, 그 이상의 품계를 지낸 이에 대해서만 신도비가 허용된다.
신도비나 묘갈은 찬문(撰文), 사자(寫字), 전액(篆額)을 위해 세 전문가(문장가와 서법가)의 손을 빌려야 한다. 이 때 청탁자에게 보내는 예물을 윤필(潤筆)이라고 한다. 비문을 청탁하고 나면 바로 돌을 사서(買石), 갈아(磨石), 바탕비(白碑)를 만들어 둔다. 그래야만 돌에 맞게 비문을 새겨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문이 마련되면 석공으로 하여금 문자를 새겨 넣고(入石), 길일을 택하여 묘 앞에는 갈석(碣石)을 세우고 묘도 동남방에는 신도비(神道碑)를 세운다(立石).
신도비(神道碑) 세부명칭 해설
1. 이수 [螭首]
요약
용의 형체를 새겨 장식한 비석의 머릿돌.
본문
이(螭)자는 본래 뿔이 없는 용 또는 교룡(蛟龍)을 가리키는 글자이다. 그 용어와 양식은 중국에서부터 사용한 것으로, 본래는 이기(彛器)·비액(碑額)·석주(石柱)·석계(石階)·인장(印章)·종(鐘)·정(鼎) 등의 표면과 머리 부분에 용의 형체를 조각하여 장식한 것을 말한다. 이 가운데 비액의 이수가 형체나 크기로 보아 가장 대표적인 것이어서 오늘날의 일반적인 개념이 되었다.
비의 기원은 주대(周代)부터 유래한 목비(木碑)에서 찾는데, 이때는 단조로운 형태의 비신(碑身)뿐이었으며, 이수가 나타나는 것은 한대(漢代)부터이다. 한대의 비의 머리는 원형머리와 규형(圭形)으로 된 두 가지 양식이 있었는데, 특히 둥근머리를 가진 비에서는 훈(暈)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자리를 장식하는데, 이 훈에 가끔 용이나 주작(朱雀) 등을 조식하였던 것이 후세 이수의 기원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시대와 남북조시대, 수대(隋代)를 거치면서 석비양식이 더욱 발전하고, 당나라 때에 와서 지금의 이수와 비신, 방부(方趺)·귀부(龜趺)를 가진 석비양식과 수법의 기본형이 등장하고, 이것이 한국에 전해져 고려시대까지 한국 석비의 기본양식이 되기도 하였다. 당나라 때에 완성된 이수의 특색은 둥근머리의 형태에 좌우 2∼3마리의 반룡(蟠龍)들이 서로 얽힌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반룡의 머리만을 나란히 하여 석비를 물고 비신을 일제히 들어올리는 듯한 형상으로 조각되어 있는 점이다. 이러한 당대(唐代) 석비의 양식이 통일신라시대에 수용되어 한국의 석비에서도 귀부와 이수가 갖춰지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에는 당비의 이수의 특징을 그대로 갖추고 있으나, 9세기 후반기에 가면 둥근 머리형에서 관형(冠形) 또는 개형(蓋形)으로 변화되어 간다.
고려 초기까지 이러한 형식이 이어지다가 12세기 말에는 이수 없는 비신 위에 우진각 지붕형으로 된 규두형(圭頭形) 석비가 나타나고, 14세기 말에는 옥개풍(屋蓋風)의 지붕형 이수를 가진 또다른 형식이 출현한다. 그러다 조선 초기에는 다시 당송시대의 이수를 가진 석비양식이 보이기도 하다가 15세기 말경부터는 고려 말의 옥개형 석비형식을 기본으로 하는 간략한 양식이 주조를 이룬다.
2. 귀부 [龜趺]
요약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
본문
삼국시대부터 쓰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귀부 위에 비신을 세우고 비신 위에 두 마리 용으로 장식된 이수(螭首)를 씌우는 것이 보통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용의 모습 외에 해태 모습을 한 것도 있고, 사실적인 거북 모양에서 점차 변형되어 장중한 것, 패기에 넘치는 것, 우아한 것 등 형태를 달리한 것이 많다. 태종무열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의 귀부와 이수는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높이 평가된다.
3. 보주 [寶珠]
요약
불교에서 이것을 가진 자의 모든 원망(願望)을 성취시켜 준다는 주옥(珠玉).
원어명 cintāmani
본문
원하는 보물이나 의복 ·음식 등을 가져다 주며 병고 등을 없애 준다는 공상의 보주로서, 악을 제거하고 혼탁한 물을 맑게 하며, 재난을 없애는 공덕이 있다고도 한다. 보주 ·여의보 ·여의주라고도 한다. 법(法:진리)이나 불덕(佛德)에 비유되기도 하는데, 경전의 공덕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마갈어(摩竭魚:바다에 살며, 두 눈은 해와 같고, 입을 벌리면 어두운 골짜기와 같아서 배도 삼키고 물을 뿜어내는 것이 조수와 같다는 상상의 고기)의 머리 속에서 나왔다고도 하며, 제석천(帝釋天)이 가지고 있는 물건이 부서지면서 떨어진 것, 석가의 사리(舍利)가 변한 것이라는 등 여러 설이 있다.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마두관음(馬頭觀音) ·지장보살(地藏菩薩) 등이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사람들의 원을 채워주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4. 제액 [題額]
요약
1. 액자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씀.
2. 비신(碑身)의 상단부나 이수에 비의 명칭을 새긴 부분.
본문
비석 제액(題額)은 대부분 전서로 썼기 때문에 전액(篆額)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스크랩.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항암 성분이 들어있는 약초 (0) | 2010.08.15 |
---|---|
[스크랩] 조경단(擎慶壇) (0) | 2010.08.02 |
[스크랩] 등록 신도비(神道碑)/문화제청 (0) | 2010.08.02 |
[스크랩] 500년만의 귀향 - 일본에서 돌아온 조선그림 (0) | 2010.07.25 |
[스크랩] 내 사랑 ~ (0) | 2010.0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