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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등록 신도비(神道碑)/문화제청

윤여설 2010. 8. 2. 05:59

 

등록 신도비(神道碑)/문화제청

 

종 목 보물 제584호

명 칭 윤문효공신도비(尹文孝公神道碑)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시 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1975.03.31 소 재 지 전남 구례군 산동면 이평리 산91-1

소유자(소유단체) 남원윤씨종중 관리자(관리단체) 남원윤씨종중

 

신도비란 죽은 사람의 생전의 행적을 기록하여 묘 앞에 세우는 비이다. 조선시대에는 정2품이상의 관직에 있는 사람 중 위업을 세웠거나 학문이 뛰어나 후세에 모범이 될 때에 신도비를 세워 기리도록 하였다 한다.

 

이 비는 조선시대의 문신 윤효손의 신도비이다. 윤효손(1431∼1503)은 단종 원년(1453)에 과거에 급제하여 황해도관찰사, 형조판서, 우참찬 등을 두루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다. 성종때에는『경국대전』과『오례의주』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연산군 9년(1503)에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거북받침돌은 앞발의 형태가 특이한데, 보통 머리쪽을 향하고 있는 것에 비해 이 앞발은 뒤로 구부려 발톱을 아래의 연꽃받침에 붙이고 있다. 머릿돌에 새겨진 용의 조각은 사실성이 뛰어나며, 꼭대기에는 둥근 돌을 얹어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비문에는 윤효손의 평생업적과 자손들의 계보 및 그의 충효와 인품을 기리는 글들이 적혀 있다.

 

조선 중종 14년(1519)에 세워진 비이다. 비문은 신용개가 짓고, 신공제가 글씨를 썼는데, 글씨는 고려시대에 비해 필력이 떨어진다.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60호 (서초구)

명 칭 성안공상진묘역 (成安公 尙震 墓域)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1984.11.03 소 재 지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산152-5

소유자(소유단체) 학교법인상문고등학교 관리자(관리단체) 학교법인상문고등학교

상 세 문 의 서울특별시 서초구 문화공보과 02-570-6410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앞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상진(1493∼1564)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상진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매부의 집에서 자랐으며, 중종 14년(1519)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친 후 명종 4년(1549)에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그후 명종 18년(1563) 까지 재상자리에 있으면서 충성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직무에 충실하였다. 성품 또한 청렴결백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는데, 그가 죽자 명종은 ‘성안(成安)’이란 시호를 내렸다.

 

상문고등학교 내에 자리하고 있는 비는 꽃과 호랑이를 새긴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명종 21년(1566)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선조 때 문장가인 홍섬이 짓고, 글씨는 송인이 썼다.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86호 (논산시)

명 칭 익성군신도비및무석(益城君神道碑및武石)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3기/5457

지정(등록)일 1979.07.03 소 재 지 충남 논산시 은진면 용산리 산93-3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사유 관리자(관리단체) 전주이씨종중

상 세 문 의 충청남도 논산시 문화관광과 041-730-3226

 

익성군의 신도비(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 남동쪽에 세워 두는 비)와 그의 묘 양쪽에 세운 한쌍의 무인석이다.

 

익성군(1556∼1612)은 중종의 증손자로 이름은 형령이다. 명종 21년(1566)에 태어나 13세에 익성정이 되고,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의주에 머물자 그곳에 가 있었으며, 서울로 돌아와 선조 30년(1597) 익성군에 봉해졌다. 광해군 4년(1612) 이이첨의 무고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치었다.

 

신도비는 높은 받침돌 위에 한돌로 이루어지 비몸과 머릿돌을 세운 모습이다. 머릿돌의 앞면에는 용을 새기고, 옆면과 뒷면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비문은 비몸의 앞면에만 새겨 놓았다. 인조 21년(1643)에 세운 비로, 조익이 비문을 짓고, 오준이 글씨를 썼다.

 

무인석은 전체가 하나의 돌로 조각된 것으로,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었다. 양손은 가운데로 모아 칼을 잡고 있으며 허리에는 칼집을 차고 있다. 엄숙하고 단정하며 위엄이 느껴지는데, 조선 중기의 조각 수준을 가늠해 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301호 (합천군)

명 칭 합천화양리야천신도비(陜川華陽里冶川神道碑)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1994.07.04 소 재 지 경남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 산53-4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반남박씨문중 관리자(관리단체) 반남박씨문중

상 세 문 의 경상남도 합천군 문화공보과 055-930-3175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박소(1493∼1534) 선생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박소 선생은 학문에 뛰어난 이로, 중종 14년(1519) 대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 홍문관의 부수찬, 사간원의 사간 등을 지냈고, 생을 마친 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선조 23년(1590) 당대의 명필인 한석봉의 글씨를 새겨 비를 세웠다.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59호 (송파구)

명 칭 충헌공김구묘역(忠憲公 金構 墓域)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1984.11.03 소 재 지 서울 송파구 방이동 몽촌토성내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청풍김씨종친회 관리자(관리단체) 청풍김씨종친회

상 세 문 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문화체육과 02-410-3412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앞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김구(1649∼1704)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김구는 숙종 8년(1682) 문과에 급제한 후 사헌부 ·사간원에 재직하면서 당대의 시국에 대한 많은 상소를 올리는 한편 노론과 소론의 격심한 당쟁을 완화시키려 애썼다. 그후 대사간을 거쳐 판결사로 있을 때에는 노산군의 복위를 주장하여 단종으로 왕위를 회복시켰고, 아울러 단종비 송씨의 묘를 능으로 추봉하고 능을 조성하는 공사를 맡아 보았다. 이후 형조판서를 거쳐 숙종 29년(1703) 우의정이 되었다. 그는 임금을 충직하게 섬기고 국왕의 위력에 굽히지 않았으며 의지에 따라 처신하여 임금의 총애와 백성들의 존경을 받아 그가 죽은 뒤 ‘충헌(忠憲)’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 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지붕돌에는 용, 봉황, 불로초, 구름 등의 무늬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어 단순하고 밋밋한 아랫부분과 대조를 이룬다.

 

영조 19년(1743)에 세운 비로, 비문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의현이 짓고 글씨는 서명균이 썼다.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61호 (동작구)

명 칭 동래정씨임당공파묘역(東萊 鄭氏 林塘公派 墓域)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1984.11.03

소 재 지 서울 동작구 사당동 산32-2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동래정씨문중 관리자(관리단체) 동래정씨문중

상 세 문 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문화공보과 02-820-1261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 앞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임당 정유길(1515∼1588)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정유길은 중종 33년(1538)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정언에 임명된 후 여러 관직을 두로 거쳐 선조 18년(1585)에는 좌의정에 이르렀다. 충효와 근신을 근본으로 삼고 넓은 도량을 가지고 있어 포섭력이 강하였으며 큰 일에는 대의를 가지고 과감하게 처리하였다. 또한 시와 글짓기에도 뛰어났고 서예에도 능하여 임당체(林塘體)라는 평을 받았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으로 받침돌 어깨부분에 새겨진 연꽃모양과 머리돌의 쌍룡무늬 조각이 매우 정교하다. 인조 24년(1646)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외손자인 김상헌이 짓고, 글씨는 오원이 썼다.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38호 (달성군)

명 칭 이철견신도비(李鐵堅神道碑)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1기400㎡ 지정(등록)일 1995.05.12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옥포면 강림리 731-1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경주이씨양평공파종친회 관리자(관리단체) 경주이씨양평공파종친회

상 세 문 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문화체육과 053-668-3161

 

신도비란 임금이나 공신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 앞에 세우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전기의 무신인 이철견 장군을 기리고 있다.

 

이철견 장군은 세조에서 연산군사이에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호조판서, 경상도관찰사, 한성판윤 등을 지냈으며, 이시애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비는 받침과 비몸 ·머릿돌로 이루어진 형태로, 머리돌은 지붕모양을 하고 있어 조선시대 전기 신도비의 전형적인 양식을 잘 보여준다. 비몸 윗면에 ‘양평이공신도비명’이란 제목을 쓰고, 본문에는 장군의 업적을 열거하였다.

 

비문은 홍귀달이 짓고 안침이 글을 썼으며, 연산군 3년(1497)에 비를 세웠다. 원래 서울 봉천동에 있던 것을 1969년 도시계획으로 인해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312호 (안동시)

명 칭 학봉신도비및묘방석(학봉신도비및묘방석)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2기 지정(등록)일 1999.12.30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 산75-3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김종길 관리자(관리단체) .

상 세 문 의 경상북도 안동시 유교문화권개발사업단 054-851-6392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이며, 묘방석은 묘의 바로 옆에 두어 묘의 주인공을 밝혀두는 것이다.

 

이 비는 조선시대 중기 유성룡과 더불어 퇴계학파를 대표하였던 학봉 김성일 선생의 묘에서 약 50m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김성일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 그의 아래에서 배움을 익혔으며, 선조 1년(1568) 증광문과에 병과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어 의병활동을 도와 많은 공적을 남겼다. 특히 관군과 의병을 화합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데 노력하였으며, 선조 26년(1593) 경상우도 순찰사를 겸하여 도내 각 고을을 돌아다니며 격려하던 중 병을 얻어 생을 마치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과 머릿돌을 하나의 돌로 조각하여 세워놓았다.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과 구름무늬를 새겨 놓았다. 인조 12년(1634)에 세운 비로, 정경세가 비문을 짓고, 이산뢰가 글씨를 썼다. 앞면에 새겨진 비의 명칭은 김상용의 글씨이다. 묘방석은 광해군 11년(1619)에 건립된 것으로, 비보다 앞서 묘를 지키고 있던 것이다.

 

비는 건립된 시기도 도내 다른 비들에 비해 오래되었고, 규모가 거대하다. 묘방석은 보기드문 독특한 모습이다. 비의 주인공과 비문에 관련된 이들이 모두 퇴계학파를 계승하는 영남학파의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볼 때도 이들이 지니는 의미는 더욱 커진다.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89호 (공주시)

명 칭 연평부원군신도비(延平府院君神道碑)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1기(116㎡) 지정(등록)일 1979.12.1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 524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연안이씨연평부원군종회 관리자(관리단체) 연안이씨연평부원군종회

상 세 문 의 충청남도 공주시 문화재관리소 041-840-2814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놓은 비를 말한다.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귀(1557∼1633) 선생을 기리고 있다.

 

이귀는 이이·성혼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군인을 모집하여 나라를 구하는데 힘썼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오르게 하는 인조반정때 공을 세워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그후 연평부원군에 봉해졌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한돌로 이루어진 비몸과 머릿돌을 세웠다. 거북받침돌은 머리를 수평으로 내밀고 있으며,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과 구름을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게 나타내었다. 비문은 조익이 글을 짓고, 오준이 글씨를 썼으며, 비의 명칭은 여우징이 썼다.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105호 (관악구)

명 칭 효민공이경직묘역(孝敏公 李景稷 墓域)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1997.12.31

소 재 지 서울 관악구 남현동 산57-10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전주이씨우곡공파 관리자(관리단체) 전주이씨우곡공파

상 세 문 의 서울특별시 관악구 문화공보과 02-880-3433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경직 선생을 기리고 있다.

 

이경직은 이항복과 김장생의 제자로, 조선 선조 때 승문원에서 처음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강화유수를 지내었고, 병으로 생을 마칠 때까지 도승지, 호조판서 등의 여러 관직을 맡아 보았다. 광해군 9년(1617)에는 일본에 회답사의 종사관으로 다녀오고, 인조 2년(164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전라절도사로서 커다란 공을 세웠다.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에는 병조참판으로 청나라의 사신과 교섭하여 화의를 성립시키기도 하였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으로, 당시의 양식을 잘 따르고 있다. 조선 현종 9년(1668)에 세운 것으로, 김류가 비문을 짓고, 그의 셋째 아들인 이정영이 글씨를 썼다.

 

역사적·학술적으로 보존할 만한 가치를 지니며, 선생의 묘소 일대는 조선시대 당시의 묘제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50호 (도봉구)

명 칭 양효공안맹담과정의공주묘역(良孝公 安孟聃과 貞懿公主 墓域)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1982.11.13

소 재 지 서울 도봉구 방학동 산63-1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사유 관리자(관리단체) 안민영외17명

상 세 문 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문화공보과 02-2289-1150

 

조선 세종의 딸 정의공주의 부군인 양효공 안맹담(1415∼1462)의 묘소와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이다.

 

안맹담은 세종 10년(1428)에 부마(駙馬:임금의 사위)가 되어 죽성군이 되었고, 세종 14년(1432)에는 연창군에, 세조 3년(1457)에는 원종공신이 되었다.

 

묘는 정의공주와 쌍분으로, 봉분 2개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으며 봉분 앞에 석등과 4기의 문인석이 있다. 묘역 아래에 세워져 있는 신도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돌의 거북조각과 머릿돌에 새겨진 두마리의 용조각은 매우 뛰어나면서도 정교한 편이다. 비문은 정인지가 지었고 글씨는 안맹담의 넷째 아들 빈세가 썼다.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48호 (강남구)

명 칭 전주이씨광평대군파묘역(全州李氏 廣平大君派 墓域)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무덤/ 기타 수량/면적 125,237평 지정(등록)일 1981.02.05

소 재 지 서울 강남구 수서동 산10-1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광평대군파종중 관리자(관리단체) 광평대군파종중

상 세 문 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문화공보과 02-2104-1262

 

세종대왕의 아들 광평대군(1425∼1444)의 묘이다.

 

광평대군의 자는 환지(煥之), 호는 명성당(明誠堂)이며 시호는 장의(章懿)이다.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에 힘썼고 국어·음률·산수에도 밝았다. 성품이 너그럽고 총명하였으며 서예와 격구에 뛰어났으나, 2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묘역은 서울근교에 남아 있는 왕손의 묘역 중 원형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문중의 묘소 700여 기와 종가의 옛 가옥이 함께 있는 공동묘역이다. 연산군 1년(1495)에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였고, 숙종 21년(1695)에 분묘의 소재지를 기록한 비를 세웠다.

 

묘역 아래에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는 비)가 세워져 있다.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300호 (함양군)

명 칭 함양평촌리옥계신도비(咸陽坪村里玉溪神道碑)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1994.07.04

소 재 지 경남 함양군 지곡면 평촌리 산32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풍천노씨문중 관리자(관리단체) 풍천노씨문중

상 세 문 의 경상남도 함양군 문화관광과 055-960-5510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노진 선생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노진(1518∼1578) 선생은 명종 1년(1548)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박사로 관직에 나아가 예조·이조판서를 지내었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분명히 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청백리(淸白吏)에 뽑혔으며, 저서로는『옥계문집』이 있다.

 

비의 형태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용을 새긴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거북등에 마련된 비좌(碑座: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에는 정교한 조각을 두었고, 머릿돌에는 구름속을 헤치는 6마리의 용이 서로 여의주를 다투는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비문은 이정구가 짓고, 신익성이 글씨를 새겼다.

 

임금께서 내리신 황해도 해중석(海中石)을 이용해 인조 9년(1631)에 세운 비로, 정교한 조각이 눈에 띄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43호 (노원구)

명 칭 연령군이훤신도비(延齡君 李昍 神道碑)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1980.06.11

소 재 지 서울 노원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육군사관학교

상 세 문 의 서울특별시 노원구 문화과 02-950-3089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우는 비로, 이 비의 주인공은 숙종의 여섯번째 아들인 연령군이다. 연령군은 숙종 25년(1399)에 태어났고 이름이 명(明), 자는 문숙(文叔)이며, 오위도총부의 도총관이었으나 이는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다. 숙종이 병으로 고생할 때 연령군이 극진히 간호를 하다가 21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숙종의 명으로 특별히 비를 세웠다.

 

비의 형태는 큼직한 거북받침에 검은 대리석의 비몸을 세우고 지붕형태의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문은 숙종 때의 우의정 이이명이 지었고, 글씨는 해서체로 조태구가 썼으며, 비의 제목은 민진원이 횡서체로 썼다.

 

숙종 46년(1720)에 세운 비로, 원래의 자리는 동작구의 대방초등학교 교정이었으나, 1967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205호 (충주시)

명 칭 충무공이수일신도비(忠武公李守一神道碑)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2001.03.30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금가면 오석리 산202-1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경주이씨충무공파종중 관리자(관리단체) 경주이씨충무공파종중

상 세 문 의 충청북도 충주시 문화체육과 043-850-6631~4

 

조선 중기의 무신 이수일(1554∼1632)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로, 신도비는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碑)를 말한다.

 

이수일(1554∼1632)의 호는 은암(隱庵)이며, 선조 16년(1583)에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밀양부사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를 맡았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왜적 격퇴에 공을 세워 가선대부에 올랐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반란군을 크게 무찔러 이겨 서울을 수복한 공으로 진무공신 2등에 계림부원군에 봉해진 뒤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이 비는 받침과 머릿돌은 화강암으로 만들고 몸체는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받침은 웅장하고 추상적인 형태로 거북 모양을 조각하였으며, 그 위에 4,100여 자의 글자를 새긴 비를 만들어 올렸다. 머릿돌의 앞뒷면에는 각각 2마리의 용을 섬세하게 조각하여 새겼다. 비의 크기는 전체 높이가 420㎝, 비신높이 243㎝, 비의 폭 97㎝, 비의 두께 27㎝이다.

 

조선 현종 8년(1667)에 세운 이 비는 이경여가 글을 짓고 김좌명이 글씨를 썼으며, 김수항이 비문을 새겼다. 웅장하고 섬세한 조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거북 받침돌의 형태가 미술사적 자료와 학술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비의 주변에는 이수일의 묘(충청북도 시도기념물 제21호)와 사당인 충훈사(忠勳祠)가 있다.

 

종 목 시도기념물 제165호 (함양군)

명 칭 세종왕자한남군묘역(世宗王子漢南君墓域)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무덤/ 기타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1997.01.30

소 재 지 경남 함양군 함양읍 교리 산755-11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전주이씨한남군파종회 관리자(관리단체) 전주이씨한남군파

상 세 문 의 경상남도 함양군 문화관광과 055-960-5510

 

조선 전기의 왕족인 정도공 한남군(1429∼1457)의 묘소이다. 그는 세종의 12남이며 어머니는 혜빈 양씨이다.

 

세종 23년(1441) 왕이 왕비와 함께 온수현(溫水縣) 가마곡(加磨谷)에 행차하였을 때 궁궐의 수비를 관장한 공으로 한남군에 봉해졌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금성대군·영풍군·혜빈 양씨와 함께 역모를 꾀하다가 금산에 유배되었다. 그 뒤 토지와 노비를 몰수 당하고 다시 함양으로 옮겨져 유배생활을 하다가 세조 3년(1457)에 생을 마감하였다.

 

봉분 아랫부분에는 둘레석이 마련되었고 묘 앞에는 상석(제사지낼 때 음식을 차려 놓도록 무덤 앞에 마련해 놓는 돌), 좌우에는 망주석(望柱石: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돌기둥) 4기와 문인석 2기, 동자상 2기가 있다. 묘비는 2기가 세워져 있는데, 묘 앞의 것은 근래에 세운 것이고, 왼쪽에 있는 것은 명종 12년(1557) 4월에 세운 것이다. 묘역 입구에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 1기가 세워져 있다.

 

종 목 시도기념물 제117호 (안성시)

명 칭 전주이씨서원군파묘역(全州李氏瑞原君派墓域)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무덤/ 기타 수량/면적 일원 지정(등록)일 1989.12.29

소 재 지 경기 안성시 보개면 북좌리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전주이씨서원군파종친회 관리자(관리단체) 전주이씨서원군파종친회

상 세 문 의 경기도 안성시 문화체육관광과 031-678-2478

 

효령대군의 둘째 아들인 서원군과 효령대군의 5대손 이신성(1552∼1596), 그의 아들 이목(1572∼1646), 손자 이지함의 묘이다.

 

서원군파의 묘역은 원래 서울 동작구 노량진에 있었는데, 1937년에 조선 총독부에서 이 일대의 땅을 강제로 사들임으로 인해 성남으로 이장했으며, 1992년에 후손들이 현재 위치로 이장하였다.

 

묘역에는 제물을 놓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상석(床石),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망주석(望柱石) 등의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묘역 입구에는 김상헌이 글을 짓고 오준이 글씨를 써서 세운 이신성의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고, 그 옆에 남구만이 글을 지어 숙종 6년(1706)에 세운 이목의 신도비가 있다.

 

종 목 문화재자료 제111호 (부안군)

명 칭 고홍건신도비(高弘建神道碑)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1984.04.01

소 재 지 전북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산132-2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고재규 관리자(관리단체) 고재규

상 세 문 의 전라북도 부안군 문화관광과 063-580-4388

 

신도비란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무신인 고홍건을 기리고 있다.

 

고홍건(1580∼1655)은 어려서부터 용모가 뛰어나고 몸집도 커서 23세 때인 선조 36년(1603) 무과에 급제하였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왕을 모시고 공주로 피난을 갔는데 그 공로로 종2품 가선대부가 되어 영원군에 책봉되었다. 병자호란 때에 왕이 남한산성으로 옮기자 어가를 모시었고, 서쪽 성문을 지키는 수문장이 되었다. 난이 끝난 후에는 여러 관직을 거쳐 지중추부사에 까지 올랐으며, 효종 6년(1655) 76세로 생을 마치었다.

 

고씨문중의 산인 석불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비는 아래로 높직한 거북받침돌을 두고, 그 위로 비몸을 세운 뒤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거북의 머리는 오른쪽으로 살짝 쳐들게 하여 힘찬 기상을 표현하였고, 구름과 용을 새긴 머릿돌은 꼭대기에 꽃봉오리모양의 머리장식을 조각해 두었다.

 

조선 현종 9년(1668)에 세운 비로, 조복양이 지은 글에 이정영의 글씨로 하여 비문을 새겨 두었다.

 

종 목 보물 제387호

명 칭 회암사지선각왕사비(檜巖寺址禪覺王師碑)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1963.09.02

소 재 지 경기 양주시 회천면 회암리 산8-1 시 대 고려시대

소유자(소유단체) 회암사 관리자(관리단체) 회암사

 

회암사터에 서 있었던 비석으로, 고려말의 승려인 나옹(懶翁)화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나옹(1320∼1376)은 1344년에 회암사로 들어가 불교에 입문하였다. 1358년 원나라에서 돌아와 왕의 부름을 사양하고 구월산과 금강산 등에서 은거하다가 회암사로 다시 돌아와 절을 크게 새로 지어올렸다. 신륵사에서 57세로 입적할 때까지 불법만을 행하였으며, 입적한 후 시호를 ‘선각’이라 하고 그 이듬해에 비를 세웠다.

 

비의 모습은 당나라의 형식을 닮은 복고풍으로, 비의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았다. 즉 비의 몸돌 윗부분에 두 마리의 용을 새긴 후 그 중앙에 비명칭을 새기는 공간을 두었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큰 돌을 단순한 조각기법으로 새겨 다소 추상적으로 다루어 놓았으나, 비머릿돌에 새겨진 용의 조각은 정갈하면서도 역동적이다.

 

비문의 글은 이색이 짓고, 글씨는 권중화가 쓴 것으로, 나옹화상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비의 글씨는 예서체로서,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 이후 고려말에 와서 처음이다. 이는 당시의 예서 연구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게 해주는 한 예이다.

 

1997년 보호각이 불에 타 비의 몸돌이 파손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를 실시한 후 보존관리상 2001년도에 경기도박물관에 위탁 보관하고 있다. 비가 있었던 원래의 자리에는 비 받침돌인 귀부가 그대로 있으며, 원형을 본따 만든 비가 세워져 있다.

 

 

 

출처 : 숭조돈종(崇祖敦宗)
글쓴이 : hellofin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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