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전의 뿌리 손곡 이달 yyhome53 2005.05.23 17: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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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손곡 이달의 생애
이달은 쌍매당 이첨의 후예로서 1561년(명종 16년)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에서 출생했다. 박순의 문인이 되었으며,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 동리(東里), 서담 (西潭) 등이 있으나 그 중에 손곡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손곡은 일찍부터 문장에 능하고 글씨에 조예가 깊었다. 서포 김만중이 "그의 작품인 별리예장(別李禮長)은 조선을 통틀어서 5언절귀의 최고작"이라고 논평할 만큼 시재에 뛰어났으나 서출이라 중용의 길이 막혀 있었다. 그로 인해 선조 때 한림학관이 되기도 했으나 곧 사직하고 향리인 손곡리에 은거했다.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기첩의 소생이라는 출신은 인생의 약점이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뛰어난 시재가 있다는 것이 오히려 불행이었다. 이로 인해 한 때 성격상의 파탄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손곡은 시로써 인생을 유유자적하기로 삶의 방향을 정했다. 시작에 전념한 그는 새로운 시의 경지에 이르렀다. 자신의 출신에서 온 불안과 울분을 시로써 승화시킨 손곡은 총명한 제자인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에게 평민 시인으로서의 그의 이상을 전수시켰다.
손곡은 제자인 허균이 반역죄로 참형당하던 해인 1618년(광해군 10년)에 57세로 한 많은 생애를 바쳤다. 저서에 <손곡시집>이 있다.
2. 손곡리와 이달
손곡리는 본시 손위실이라고 했다. 고려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추방된 후 이곳에서 왕위를 내놓았다는 전설에 의해 그런 지명이 붙었다는 것이다. 그 뒤 조선 중엽 3당시인의 일인자로 한시계에 명성이 높던 이달이 이곳에서 출생하였다고 하여 그의 호를 따서 손곡리로 바뀌었다는 설도 있다.
우리 나라에서 시인의 이름이나 호가 지명으로 정착된 예는 별로 없다. 이로 볼 때 그의 시정신이 세인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 큰 정서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삼당시인 (三堂詩人)
조선 선조 때의 세 시인 손곡 이달, 고죽 최경창, 옥봉 백광훈을 가리킨다. 그들 3인은 박순의 문인으로 동문으로서 두터운 정과 교분을 나누며 새로운 시의 경지를 개척하였다. 고려 이후 우리 나라 시인들이 송나라의 소동파나 황산곡의 시풍을 따랐으나, 그들은 당나라에 심취하여서 3당시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 중 이달이 가장 빼어나다는 것이 당시의 평가였다.
이수광은 그들의 시가 성당(盛唐)에 이르지 못하고 만당(晩唐)에 머문 것이 애석하다고 했으나, 김만중은 그들을 가벼이 볼 수 없다고 주장하며 높이 평가했다.
4. 손곡과 허난설헌 남매와 홍길동전
당시의 명문귀족이었던 허엽이 자제인 허난설헌 남매의 교육을 손곡에세 맡긴 것은 그의 고결한 인품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허난설헌의 시가 비범했던 것은 그녀의 천재성과 아울러 스승인 손곡의 영향도 컸다. 풍자적이면서 서민 생활을 옹호하는 난설헌의 시정신은 스승의 정신적인 교훈에 힘입은 바라 할 수 있다.
허균은 그의 소설 <홍길동전>에서 서자인 홍길동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길동으로 하여금 악덕 관리를 혼내 주고, 모험을 감행하여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하고 끝내는 해외에 이상국가인 율도국을 세우도록 하고 있다.
허균은 영의정을 지낸 허엽의 적자로 태어난 조선 최고의 명문 출신이었다. 그런 그가 서자 출신의 홍길동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썼다는 것은 서출로 불우한 평생을 보낸 스승에 대한 동정의 발로일 것이다. 그것은 손곡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한편, 후에 서양갑 등과 모의하여 혁명을 일으키려 모의하다가 반역죄로 처형당한 허균의 생애 자체가 이달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5. 허균의 전기소설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
손곡산인전은 허균이 지은 전기 형식의 고대 소설로 스승 이달의 생애가 애절하고 예리한 필치로 담겨 있다. <성소부부고>에 실린 이 소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손곡은 3당시인으로 명성이 높았지만, 서출이기 때문에 벼슬의 길이 막힌다. 그러나 그는 세속적인 허명에 얽매이지 않고 시국제 저촉되는 발언을 과감히 하여 권력층의 비난을 산다.
권력층에서는 손곡에 대한 질투와 증오심이 극도에 달한다. 그러나 민중의 지지가 높은 그이기에 노골적인 박해를 할 수는 없었다. 손곡은 봉건시대에도 굴하지 않는 평민 시인으로서 험난한 삶을 살아간다.
* 자료 출처 : 이 글은 1986년도 부론중학교 교지에 실었던 글이며, 당시 백과사전과 향토지 등을 참조했던 듯하나, 정확한 출처는 기억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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