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12월 26일, 전쟁은 끝이 났지만 여전히 피난민들이 잔뜩 진을 치고 있던 부산의 용두산(龍頭山) 인근에서 느닷없이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판자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피난민촌이었으니 순식간에 불이 번져나가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 붉은 벽돌창고가 하나 있었다. 마침내 불길이 그 벽돌창고에 이르렀을 때 조선왕조의 역사는 한 움큼 허공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 시절 부산 동광동(東光洞)의 부산국악원 창고였다는 그곳에는 바로 난리통에 소개(疏開)된 조선왕조의 유물들이 가득 들어 있었던 탓이었다. 거기에는 창덕궁 선원전에 있다가 옮겨진 역대국왕의 진영(眞影)과 더불어 어필(御筆)과 궁중유물이 그득했는데, 화재로 말미암아 대다수의 유물이 한 순간에 재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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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년 12월의 부산화재로 인한 궁중유물의 피해내역을 보도한 <경향신문> 1955년 1월 6일자. 이때의 불로 그 숱한 조선역대국왕의 어진(御眞)은 홀랑 다 불타버리고 온전한 것으로는 영조임금의 것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혹여 불타버린 어진들의 사진자료는 남아있지 않는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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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구황실재산관리총국과 치안국의 조사에 따르면, "12대 임금의 어진영(御眞影)과 궁중일기(宮中日記) 등 약 4천 점 중에 3천 5백 점이 화마(火魔)에 의해 재로 화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휴전(休戰)의 뒤끝이라 머지않아 서울로 다시 유물을 되돌려놓을 계획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찰나에 그러한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못내 안타까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고 해야 하겠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일은 그렇게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진작에 안전한 보관장소가 선택되었거나 그게 아니었더라도 좀더 서둘러 서울로 옮겨졌더라면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을 테지만, 잿더미 앞에서 그러한 소리가 무슨 소용이 있었을 것인가 말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용케도 불길을 피한 어진도 없지는 않았다.
그렇게 살아 남은 어진이 바로 영조(英祖)와 철종(哲宗)의 그것들이다. 그나마 철종의 어진은 왼쪽이 3분의 1이나 타버렸으니 온전한 것은 오로지 영조의 어진 하나였다. 그리고 또 하나 연잉군(延 君) 시절에 그려진 영조의 어진이 하나 더 남아 있긴 한데, 이것 역시 한쪽이 완전히 불타버린 채로 남아 있다.
그러니까 지금 남아있는 조선국왕의 어진은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모셔진 태조(太祖)의 초상을 비롯하여 영조와 철종과 고종의 것이 남아 있는 것이 전부이다. 이것 말고도 추존왕 익종(翼宗)의 어진이 화재에 크게 훼손된 채로 남아 있다고는 하는데 더 이상의 구체적인 내역을 알지 못한다.
이렇게 본다면 결국 조선시대 국왕의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직접 사진이 남겨진 고종과 순종의 경우를 합치더라도 태조, 영조, 철종, 익종의 여섯 임금을 넘어서지 못한다.
국왕의 초상으로 국가문화재에 지정된 것이 경기전의 '조선태조왕이성계상'(보물 제931호)과 궁중유물전시관의 '조선영조왕이금상'(보물 제932호), 이렇게 겨우 둘 뿐이라는 사실이 이러한 형편을 잘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원래 국왕의 어진들은 이토록 소략했던 것이었을까? 알고 보니 전혀 그렇지는 않았다. 얼추 100년 전의 상황만을 간추려 보더라도 북부 순화방에 있던 선희궁(宣禧宮) 자리에 옮겨진 평락정(平樂亭)에는 정조, 순조, 익종, 헌종, 철종의 어진이 봉안되어 있었고 또 경모궁(景慕宮) 자리에 옮겨진 영희전(永禧殿)에는 태조, 세조, 원종, 숙종, 영조, 순조의 어진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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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수궁 전경.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환궁할 적에 덕수궁의 영역은 저 너머 서대문 쪽 경희궁이 있는 부근에까지 이르고 있었으며, 그 중심에는 '선원전'이 있었다. 그러나 고종이 승하한 이후에는 다시 지금과 같은 규모로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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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이순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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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선원전(璿源殿)이 있었다. 그 무렵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고종이 경운궁(慶運宮) 즉 지금의 덕수궁을 환궁할 곳으로 정하고 여기에 대대적인 공역을 벌이기에 앞서 가장 먼저 신축한 것이 바로 선원전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다 경복궁의 집옥재(集玉齋)에 있던 역대선왕의 진영(眞影)을 서둘러 옮겨오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 때가 1896년 9월 4일이었다.
여기에도 모두 태조를 비롯하여 일곱 국왕의 어진이 모셔졌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역대국왕의 어진은 중복된 수효를 감안하더라도 비교적 풍부하게 두루 남아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 시기에 존재했던 어진들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전무하다시피 하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1954년의 부산화재로 인하여 대부분 소실된 탓도 있지만, 남겨진 어진조차도 1900년에 이르러 새로이 옮겨 그려진 것들이었던 까닭이다. 과연 그러했다. 경운궁에 새로 지어진 선원전은 1900년 10월 13일 밤중에 화재가 발생하여 건물은 물론이고 그 안에 모셔진 어진들이 몽땅 다 불에 타버리는 참화를 당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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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인 의사 분쉬 박사가 남긴 한 장의 풍경사진이다. 단정할 수는 없으나 배경에 나오는 산의 지형으로 판단하건대 러시아공사관 전면의 영성문 일대를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며, 만약 이러한 추론이 틀리지 않다면 오른쪽의 붉은 표시부분은 영성문(永成門)인 듯하고 또 왼쪽의 파란 표시부분은 선원전(璿源殿)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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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니 불타버린 어진들은 당연히 기존의 것을 본떠 다시 만들어내는 도리밖에 없었다. 실제로 1900년 11월 19일에는 영희전(永禧殿)과 냉천정(冷川亭)과 평락정(平樂亭) 등에 흩어져 있던 태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익종, 헌종의 어진을 모두 흥덕전(興德殿)에 이봉(移奉)하여 모사에 착수하게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선원전의 위치도 아예 새로운 자리를 물색하게 하여 결정하였으니 '영성문내서변신좌지지(永成門內西邊辛坐之地)'가 그곳이었다. 말하자면 한때 경기여고가 자리했던 그 권역이었다. 딱히 그 위치를 가려내자면 경기여고가 있던 쪽은 아니었고, 지금의 미국부대사관저가 있는 쪽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요즘 미국대사관 직원용 아파트와 미국대사관 신축예정부지라 하여 세상을 시끌벅적하게 하는 바로 그 자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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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다 세이고(小田省吾)의 <덕수궁사>에 수록된 '덕수궁평면도'이다. 붉은 표시(즉 지금의 미국부대사관저)에는 선원전(璿源殿)과 사성당(思成堂)이 있었고, 파란 표시(즉 예전의 경기여고 자리)에는 흥덕전(興德殿)과 흥복전(興福殿)이 있었으며, 검은 표시(즉 지금의 덕수초등학교)에는 의효전(懿孝殿)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위쪽의 분홍표시는 영성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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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알고 보면 이곳 선원전에만 역대국왕의 어진이 모셔진 것은 아니었다. 선원전과 나란히 붙어 있던 사성당(思成堂)이란 곳에도 역시 어진이 들어 있었다. 영희전에서 옮겨온 세 국왕의 어진이 여기에 모셔졌던 것은 분명한데 그것들이 언제 이곳으로 옮겨진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확인하기가 수월치 않다.
다만 1908년 7월 23일에 "영희전, 목청전, 화녕전, 냉천정, 평락정, 성일헌 등에 봉안하였던 어진을 모두 선원전에 이안하였다"는 기록이 따로 남아 있는 걸 보면 아마도 이 무렵에 옮겨진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여러 곳에 적절하게 분산 배치되어 있던 역대임금의 어진들을 구태여 한곳에 다 모아야 할 이유가 달리 있었던 것일까?
어쨌거나 이러한 경우에 자칫하다가는 한꺼번에 어진들이 몽땅 소실되는 위험에 노출되는 가능성은 그만큼 더 높아졌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결과론적인 얘기이겠지만 만약 그 즈음에 전주 경기전에 있던 태조의 어진까지도 한꺼번에 수습했었더라면, 그리고 이것마저 난리통에 부산으로 옮겨졌더라면 결국 그것마저도 영영 사라져버리는 일이 생겨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피난지 부산의 어느 벽돌창고에서 수두룩했던 어진들이 한꺼번에 허공에 사라졌던 50년 전의 바로 그날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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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선원전에 있던 어진들은 언제 창덕궁으로 옮겨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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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10월의 화재발생으로 덕수궁 선원전이 완전히 소실되고 그 바람에 영성문 안쪽에서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고 또한 기존의 어진들을 모사하여 봉안할 '선원전'의 신축공사가 마무리된 것은 그 이듬해 7월 11일이었다. 하지만 이때에 세워진 선원전 역시 제 역할을 다한 것이 불과 20년 남짓이었다.
영성문 안쪽 터에다 선원전을 세운 것이 고종임금의 뜻이었다면, 결국 그곳에서 선원전이 사라지게 했던 것 역시 고종임금 그 자신이었다. 고종임금이 승하하자마자 선원전 권역은 지체없이 잇달아 훼철(毁撤)되는 운명을 겪어야 했던 탓이다. 말하자면 덕수궁의 주인이 사라졌으니 궁궐로서의 기능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 그럴싸한 핑계로 내세워졌다는 얘기이다.
결국 덕수궁 선원전에 봉안된 어진들은 1920년 2월 16일에 창덕궁의 '구선원전'으로 몽땅 옮겨지게 되었다. 그때가 고종임금이 세상을 떠난 지 겨우 한 해가 지난 시점이었다. 창덕궁으로 옮겨진 어진들은 다시 그 이듬해 3월 20일에 북일영(北一營) 자리에 신축된 '신선원전'으로 다시 자리를 옮기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어쨌거나 나중에 여기에 모셔진 어진들은 부산에서 대부분 불타버리고 말았으니 두 선원전은 지금껏 모두 주인을 잃은 빈집으로만 남아 있는 셈이다. / 이순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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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우 기자 (takehome@hanmail.net)
덧붙이는 글
기자소개 : 이순우 기자는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에 관한 조사보고서>의 저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