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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는 어떻게 쓰는가 - 오세영 교수, 시 창작 지침서 ‘시 쓰기의 발견’ 펴내

윤여설 2013. 5. 15. 10:51

 

시는 어떻게 쓰는가

오세영 교수, 시 창작 지침서 ‘시 쓰기의 발견’ 펴내

 

 

시(詩)도 많고 시인(詩人)도 참으로 많다. 이 삭막한 세상에 잘 쓰던 못쓰던 시 또는 시같은 글을 쓰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건 좋은 현상이다. 적어도 감성이 살아있고 영혼이 살아있다는 증거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중에 범람하는 시들 중 제대로 된 시, 시다운 시는 얼마나 될까? 자기의 주장이나 생각을 시처럼 운율 만 맞추면 시라고 할 수 있는가?

 

48년 넘게 시를 쓰고 20권의 시집과 수십권의 문학관련 서적 및 논문을 써온 오세영 서울대 명예교수(전 한국시인협회 회장, 예술원 회원)가 2006년 ‘시창작의 이론과 실제’(오세영, 장부일 공저)에 이어 최근 다시 시창작 지침서인 ‘시 쓰기의 발견’을 펴냈다.

시란 무엇인가, 시적 진실, 시의 범주, 이미지·은유·상징·신화, 역설과 아이러니, 대상과 시 쓰기의 일곱가지 유형, 발상은 어떻게 얻는가, 시상 전개의 원리와 방법, 형상화, 예외적인 시의 창작 등 총 21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필자가 알고 있는 한, 한 마디로 이제까지 나온 관련 서적 중 ‘가장 모범적이고 체계적인 시창작 지침서’라고 감히 말하고싶다.

 

오세영 교수는 책 머리말에서 “시는 물론 여러 가지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여러 가지 방식의, 여러 가지 유형, 여러 가지 형태의 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이 썼다고 해서 모두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독자가 그것을 시라고 인정해서 시가 되는 것도 아니다. 더더구나-어떤 시 창작 지도서가 당당히 공언하고 있는 것 처럼- 무엇이나 쓴다고 해서 시가 될 수는 더더욱 없다. 시에는 일종의 규범체계(system of norm)가 있어 이를 무시하면 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작은 바로 시의 이 규범체계를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시란 무엇인가?

오세영 교수는 이 책에서 시란 “총체적 진실을 이미지, 은유, 상징 등과 언어의 음악성으로 형상화시킨 일인칭 현재시제(現在時制)의 함축적 자기 독백체 진술”이라고 간단히 요약한다. 이상의 정의는 기본적으로 여섯 가지 조건이 전제되어 있다. ⑴총체적 진실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 ⑵언어의 음악성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 ⑶이미지, 은유, 상징 등으로 형상화시켜야 한다는 것, ⑷일인칭 시점의 자기 고백체라는 점, ⑸현재시제라는 점, ⑹짧게 함축된 진술이라는 점 등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를 시의 여섯 가지 요소라 부른다.

 

시적 진실에 관하여 저자는 “사실(fact)과 진실(truth)은 자주 혼동되는 듯 하다. 그러나 이 둘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선 ‘사실’은 인식의 대상이 드러내 보여주는 어떤 객관적 양상이다. 즉 인식 대상 그 자체가 드러내고 있는 그 무엇이다. 이에 반해 진실은 대상 그 자체 만의 속성이 아니다. 그것은 대상과 인식주체(주관)가 협동해서 만들어낸 어떤 의미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사실’은 객관성을 띄고 있지만 ‘진실’은 어 느 정도의 주관성을 포함하게 된다. 최소한 진실은 순수하게 객관적이지만은 않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사실과 진실은 시와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가. 오 교수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는 결코 사실을 쓰지 않는다. 사실은 과학의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넓은 의미로 ‘문학’이라 부르는 것 가운데는 예외적으로 사실을 추구하는 것이 없지도 않다. 논픽션이라든가, 전기(biography)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건대 시의 경우는 그 어떤 것도 사실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하면 산문-그 중에서도 과학적인 산문이 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는 일차적으로 사실이 아닌 진실을 표현하는 언어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또 “시는 물론 철학이나 종교가 아닌, 예술의 한 장르이다. 따라서 단순히 세계가 지닌 총체적 진리를 관념적으로 표현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시가 될 수는 없다. 미학적 형상화라는 또 다른 측면이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시가 관념적, 추상적인 진술이 아니라 구상적, 감각적 진술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이미지, 은유, 상징에 의한 언어적 형상화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가령, ‘⑴내 마음은 슬프다. ⑵내 마음은 벌레 먹은 능금이다’의 두 진술이 있다고 하자. 이 중에서 적어도 ⑴은 시적 진술이 될 수 없다. 비록 감정에 관련되어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 상상력이 개입되어 있지 않고 그 진술 역시 ‘감정에 대한 진술’이지 그 자체로 ‘감정적 진술’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슬픔’이라는 감정의 사실 보고 혹은 감정이라는 개념의 언어적 전달 이상이 아니다. 그러나 ⑵는 그렇지 않다. 시인 자신의 특별한 감정적 반응이랄까, 시인에게 환기된 감정 바로 그 자체가 형상화되어 있다. 따라서 ⑵가 시적 언어가 될 수 있는 비결은 시인이 상상력을 통해서 자신이 체험한 바 그 정서적 반응을 은유적으로 형상화시킨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시가 은유, 상징, 이미지, 신화, 역설, 따위로 쓰여질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가 지적한 바와 같이 시인은 총체적 진실을 바로 이미지, 은유, 상징, 신화 그 자체로 깨우친다. 이미지, 은유, 상징, 신화 그 안에 총체적 진실이 녹아 있는 것이다. 시인은 이미지, 은유, 상징, 신화 그 자체로 사유하고 명상한다. 그러므로 그 무엇보다도 참신하고 가치있고 더 나아가 아름답기까지 한, 어떤 이미지나 은유, 상징, 신화 등을 발견해 낼 수 없는 시인은 결코 훌륭한 시인이라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과학적 진실이 이성적, 객관적, 분석적, 논리적인데 반해, 시적 진실은 감정적, 주관적, 직관적, 비논리적·모순의 진실이라고 정리한다. 예를 들어 ‘밤 하늘에 둥근 달이 밝게 떠 있다’고 하는 것은 이성적 진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신이 듣는 하늘의 귀’라고 말하는 것은 감정적 진실에 속한다. 감정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다. 이는 시적 진실이 모든 사람에게 항상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즉, 과학적 진실은 모든 사람에게 항상 동일한 의미로 작용하나 시적 진실은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그것도 각자 다른 의미로 작용한다. 가령 위 인용시에서 시인이 달을 ‘하늘의 귀’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 아니라 오직 한 특별한 시인이나 이 시에 감동을 받은 독자들의 경우에 한해서 그러하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객관적 진실은 과학으로, 주관적 진실은 시로 귀납된다. 시는 순간적인 인상 혹은 돌발적인 깨달음을 통해 얻어진 진실, 즉 직관적 진실이다. 거기에는 어떤 분석적 사유도 비판적인 성찰이나 추리도, 인과의 원리도 없다. 마치 선수행자(禪修行者)가 어느 순간 돈오(頓悟)의 경지에 들 듯 그렇게 스스로 깨달아 알게 되는 진실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진실(진리)이란 반드시 논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뒤가 맞지않은, 즉 모순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는 진리에 대한 오해이자 편견에서 오는 착각이다. 원래 진실이란 사실처럼 객관(대상) 그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며 인식의 주체 즉 주관과의 관계 합작 속에서 만들어지는 어떤 의미 혹은 가치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사실에 토대한 객관적인 것도 있을 수 있지만, 감정에 토대한 직관적 혹은 주관적인 것도 있을 수 있다.물론 여기서 ‘감정적’ 혹은 ‘주관적’이라는 말은 논리 혹은 인과의 원리를 초월한다는 의미에서 의미의 비논리 혹은 모순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시적 진리는 모순의 진리인 것이다.

 

시적 발상은 대상에 대한 통찰과 상상력 그리고 직관, 즉 이성을 초월한 주관 혹은 감성을 통해 얻어진다.

오세영 교수는 이에 대해 “시적발상은 우선 대상을 통찰함으로써 시작한다. 통찰이란 물론 대상을 정시하여 그 본질이 무엇인가를 헤아려보는 의식이다. 가까운 정신활동으로는 물론 ‘관찰(observation)'이라 부르는 것도 있다. 그러나 통찰과 관찰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관찰이 대상의 외면 혹은 현상을 주시하여 그것을 객관적, 분석적, 구조적으로 이해하는 정신행위라면, 통찰은 이와 달리 대상의 내면 혹은 실재를 하나의 전체로 놓고 그것을 순간적, 직관적으로 들여다보는 행위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찰을 통해서 우리는 인식대상을 다만 ’이해‘할 뿐이다. 과학의 영역이다. 그러나 통찰에 의해서는 '깨우침(realizing)'을 얻는다. 그것은 시의 영역이다”라고 설명한다. 그는 또 “시 창작이나 독서에서 통찰보다도 오히려 더 중요한 정신활동이 있다면 그것은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일단 논리를 초월한 어떤 주관적 사고로 정의된다. 가령 ‘꽃밭에 장미꽃 한 송이가 피어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순수한 객관적 사고의 토로이다. 그러나 ‘꽃밭에는 장미 한 그루가 등불을 밝히고 있어요’라고 말한다면 이는 이미 상상력의 영역 안에 들어와 있는 표현이 된다. ‘장미꽃’이 ‘등불’이 된다는 것은 사실에 근거를 둔 논리적 사고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오 교수는 “시적 발상을 얻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사물에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고정된 관념이나 일상적 관습에 얽매인 사고는 기존의 의미체계나 통설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식의 전파나 도덕적 선전과 같은 실용적 목적에서 쓰려는 시가 아니라면 시는 본질적으로 현실 추수적이거나 보편화된 일체의 가치들에 대하여 일단 회의를 갖고 그것을 다른 시점에서 통찰해 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또 “시는 가능한 한 언어를 절제하고 의미를 함축시키는 데서 그 미학적 효과가 극대화된다. 산문가가 한 권의 저서 혹은 한 권의 소설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을 시인은 단 한 편의 시 혹은 단 한 행의 시행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소설가가 무엇을 쓸 것인가를 고민할 때 반대로 시인은 무엇을 쓰지않을 것인가를 고민한다”고 말한다.(정리/임윤식)

 

 

출처 : 서리풀사진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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