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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죽어서 빛난 이름` 함양 선비 정여창의 발자취가 궁금해!!

윤여설 2010. 7. 19. 14:26

 

 

한국의 유학사를 빛낸 학자들은 많습니다. 특히 문묘(文廟)는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을 모셔놓

고 거국적으로 제향하는 사당으로 학문과 행실의 모든 면에 있어서 유교문화의 사표가 되는 인물

만을 배향해온곳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문묘에 배향하기위한 심의와 여론 수렴의 과정은 수십 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블로그 기자가 찾은 경남 함양의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선생의 경우도 40년 이상이 걸렸다

고하니 과정이 어려운것은 사실입니다.

정여창 선생은 학식도 높았지만 효성과 겸손의 행실에 감동을 준 인물입니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

가볼까요?

 

 

정여창은 실천유학의 선구자

 

정여창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에 힘쓰다가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

을 연마합니다. 《논어》에 밝았고 성리학의 근원을 탐구하여 체용(體用)의 학을 깊이 연구하였고

조선 전기 사림파의 주자학적 학문을 계승하였습니다.

사림파는 인(仁)을 보편적 가치의 정점으로 삼아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음(안의) 현감 재직시 도학사상을 왕도정치로 실천하여 주민들의 복지향상에 주력하였다고 합니다.

정여창은 조선조 5현이며 동국18현으로 성균관을 비롯한 전국 234향교와 9개의 서원에서 받들어

모시고 있는 조선 성리학의 대가입니다.

동방오현이나 동국 18현은 모두 유학을 발전시킨 학자로 동국18현은 삼국시대에서 조선까지 동방

오현은 조선시대 유명한 유학자를 정하여 문묘에 조사하였습니다.

 

▶동방오현은 어떤 분들인가요?

 

  일두 정여창(鄭汝昌) 환훤당 김굉필(金宏弼) 청암 조광조(趙光祖) 회재 이언적(李彦迪)

  퇴계 이황(李滉)

 

▶동국 18현은 어떤 분들인가요?

 

  신라시대 : 설총, 최치원

  고려시대 : 안향, 정몽주

  조선시대 :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김인후,이이,성혼, 김장생,조헌,김집

                  송시열,송준길,박세채

 

소박하고 주위 자연과 어울리는 남계서원

 

함양은 예로부터 많은 선비를 배출하여 자부심이 대단한 곳입니다. 함양의 기틀을 마련한 정여창

의 남계서원(사적 제499호)은 함양에서 거창으로 가는 3번 국도변 남계마을(경남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586)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남계서원은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설립된 서원으로 정여창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것입니다.서원 앞을 흐르는 시내 이름을 따서 ‘남계’라는 이름으로 사액되었지요. 

대원군 서원 철폐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중 하나로 경남에서는 유일하게 남아있던 서원입

니다.지방 문화의 진흥과 교육에 큰 역할을 한곳으로 오랜 세월 역사와 더불어 높은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남계서원은 경사지를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건물을 배치한 서원으로 앞쪽은 강학기능을 갖춘 강당

을 중심으로 동, 서재와 누각 등이 배치되었고 뒤쪽은 제향기능을 갖춘 사당을 배치하여 전학후묘

의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함양의 남계서원은 조선조 유학자로서 처음으로 사액까지 받았으니 이 또한 남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겠지요.

 

 

일두 정여창 고택(古宅)

 

남계서원에서 남계천을 건너면 정여창 선생의 고택(중요민속자료 제186호)이 있는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입니다. 마을은 전통 마을의 이미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골목길은 얇고 넓적한 돌로 포장하였고 막힌 듯 한 골목길을 돌아가면 대문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남도 지방의 대표적 양반 고택으로 솟을대문에 충, 효 정려 편액 5점이 걸려있는것이 특징입니다.

대문을 들어서면 안채로 들어가는 일각문이 있고 사랑채가 눈에 들어옵니다.

사랑채는 높은 댓돌위에 세워져있는데 구조가 간결하면서도 단아한 모습입니다.

문헌세가(文獻世家), 충효절의(忠孝節義),백세청풍(白世淸風)의 글귀가 걸려있습니다

일각문을 들어선 후 중문을 지나면 개방적으로 분할되어 집이 밝고 화사하게 보입니다.안채 뒤편

으로는 가묘와 별당이 있습니다.

옛손길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양반가의 정갈한 기품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후기에 중건한 것인데 TV드라마 ‘토지’의 촬영장소로 이용되면서 탐방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고합니다.

고택 관리가 깔끔하게 잘되어있어 방문객들도 조심스럽게 발길을 이동합니다.

 

 

 

정여창 선생 묘소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고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종직이 화를 입자 이에 연루되어 정여창은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가 유배생활 7년째되는해에 그곳에서 숨을 거둡니다.

문인과 유림들은 머나먼 그의 고향 함양까지 두 달에 걸쳐 시신을 옮겨와 장사를 지냅니다. 유배

지에서 생을 마감한 정여창의 묘는 서원뒤 승안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죽움뒤에도 또 다른 화가 가해지는데 갑자사화입니다.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

김굉필이 사사될 때 정여창은 부관참시를 당합니다.

조선시대 사림을 대표하는 그의 묘소에는 온화한 그의 성품을 반영하듯 문인석 또한 순한 표정을

지은 채 양쪽으로 하나씩 서 있습니다.

또한 정여창 묘 앞에는 당당한 모습의 신도비가 서 있어 눈길을 끕니다.이 신도비는 1689년 3월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려 하자 자결을 시도한 동

계(桐溪) 정온(鄭蘊,)이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두전(頭篆) 및 비문 전체의 글씨는 이조판서를 거쳐 판돈령부사에 이른 서곡(西谷) 이정영

(李正英)이 썼습니다.

정여창 묘소 바로 위에는 부인인 정경부인(貞敬夫人) 완산이씨 묘소가 있습니다. 부인의 묘소를

왜 위쪽에 썼는지는 알 수는 없으나 정여창의 묘소와 여러모로 많이 닮았습니다.

 

 

 

 

학문과 덕행 - 인간다운 삶의 질

 

정여창은 젊었을 때부터 그의 독특한 학문과 덕행으로 선비 사회에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반면 혹

독한 사화는 정여창을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까지 편안하지 못하였지요.

그러나 역사는 그의 억울한 명을 벗기고 나아가 유교의 전당인 문묘에까지 봉안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정여창은 자기 관리에의 의지가 철저했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부모 공경의 효행에 철저하였고 남

다른 겸양의식을 보였습니다.

정여창은 자신의 내면이나 외면 그 어느 경우에 있어서도 인간 보편의 도덕의식이 철저했다는것입

니다.

이것은 유교사회에서 ‘인간다움’의 척도로 인식할 수 있겠지요.그는 인간다운 삶의 질을 향상시

키는 실천 유학의 선구자였습니다

 

 

 

▲ 제2기 문화재청 대학생 블로그기자단 이은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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