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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Ethics │ Linda Pastan 시 │백정국 역

윤여설 2009. 8. 27. 21:18

 

Ethics | Linda Pastan

 

 

In ethics class so many years ago

our teacher asked this question every fall:

If there were a fire in a museum

would you save, a Rembrandt painting

or an old woman who hadn’t many

years left anyhow? Restless on hard chairs

caring little for pictures or old age

we’d opt one year for life, the next for art

and always half-heartedly. Sometimes

the woman borrowed my grandmother’s face

leaving her usual kitchen to wander

some drafty, half imagined museum.

One year, feeling clever, I replied

why not let the woman decide herself?

Linda, the teacher would report, eschews

the burdens of responsibility.

This fall in a real museum I stand

before a real Rembrandt, old woman,

or nearly so, myself. The colors

within this frame are darker than autumn,

darker even than winter—the browns of earth,

though earth’s most radiant elements burn

through the canvas. I know now that woman

and painting and season are almost one

and all beyond saving by children.

 

 

 

윤리학 | 린다 패스턴 작 · 백정국

 

 

아주 오래 전 윤리학 시간

선생님께선 가을이 오면 늘 이런 질문을 하셨다.

만약 미술관에 불이 난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을 구하겠어요, 렘브란트의 그림과

어차피 살날이 많이 남지 않은

할머니 중에? 그림이고 노년이고 별 관심이 없던 우리는

딱딱한 의자에 불안하게 앉아

어떤 해는 생명을, 어떤 해는 예술을

늘 내키지 않는 맘으로 선택했다. 이따금씩

그 여자는 우리 할머니의 얼굴을 하고

일상의 부엌을 떠나 어떤 바람 부는,

반쯤은 상상으로 지은 미술관을 배회했다.

어느 해인가 난 영리한 척 대답했다.

그 여자가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면 안 될까요?

린다는 책임을 회피하는구나,

선생님의 핀잔을 들을 만한 대답이었다.

올 가을 난 진짜 미술관에서

진짜 렘브란트의 그림 앞에, 내자신 할머니가

아니면 거의 그쯤의 나이가 되가 서있다. 액자 속의

색깔들은 가을보다 어둡고,

겨울보다도 어둡다—대지의 갈색들,

아주 눈부신 대지의 성분이지만

캔버스를 가로질러 불탄다. 이제 나는 안다. 여인과

그림과 계절은 거의 하나이며

그 어느 것도 아이들이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작품읽기]

 

   학교에서 가르치다 보면 소위 학문을 한다는 것이 참 쓰잘 데 없는 짓처럼 느낄 때가 있다. 내가 가르치는 것이 삶의 현실과 너무도 동떨어진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힐 때 특히 그렇다. 배우는 학생들에게는 그 괴리감이 더 클 것이다. 중학교 2학년 수학시간, 루트(√)라는 것을 처음 배웠을 때 느꼈던 당혹감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왜 멀쩡한 숫자에 이상한 기호를 씌어 놓고 제곱이 되어야만 그 굴레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못살게 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루트가 없다면 내 인생이 더 행복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수학도 일종의 언어라는 사실을 깨닫고 루트에 용서를 베풀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시 루트를 공부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학생이 선생님을 탓하는 것은 아름답지 못한 행동이지만 그때 수학 선생님이 수학이 그저 숫자노름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려주셨다면 내가 수학 때문에 재수를 할 필요는 적어도 없었을지 모른다. 물론 선생님의 입장은 다를 수 있다. 천재가 아닌 풋내기 소년들이 수학의 심오함을 설명한들 알아듣겠냐고 말이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예를 들어, 피타고라스가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발견한 수학자만이 아니라 철학자이고 과학자이기도 했다는 얘기 정도는 해주실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학창시절 선생님을 기억할 때 우리가 정녕 기억하는 것은 그 선생님이 담당 과목을 얼마나 잘 가르쳤는가가 아니라, 선생님의 말과 생각 그리고 그 분이 보여주었던 얼마간의 삶이다.

   린다 패스턴의 「윤리학」은 선생님이 학생의 기억에 남는 방법과 진정한 가르침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차분히 되돌아보게 하는 아름다운 시다.

   이 시에 등장하는 익명의 윤리 선생님은 매년 가을이면 학생들에게 똑 같은 질문을 한다. 만일 미술관에 화재가 난다면 렘브란트의 그림과 죽음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할머니 중에 누구를 구하겠느냐고. 선생님은 학문으로서의 윤리학을 가르치고자 하지 않고 실존적인 문제로서의 윤리를 학생들이 생각해 보기를 촉구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통 관심이 없다. 학생들은 그나마 시험에 길들여져, 매년 렘브란트와 할머니를 번갈아 가며 선택한다. 같은 질문에 대한 바뀌는 대답을 그 선생님이 어떻게 받아들였을 지 좀처럼 짐작이 가지 않는다. 사실 화자의 기억 속에도 학생들의 변덕스런 선택에 대한 선생님의 반응이 남아 있지 않다. 어쩌면 그 질문은 선생님이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인지도 모른다.

   어떻든 주목할 사실은 그 시절 화자를 포함한 많은 학생들이 의자에서 몸부림을 치며 윤리학 시간을 지겨워 하긴 했어도 선생님의 질문을 수업종료 종과 함께 잊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 질문 속의 할머니는 이따금씩 화자의 실제 할머니가 되어 화자가 짓은 상상의 미술관을 배회한다. 그리고 그 기억과 더불어 화자는 수없이 많은 가을이 지난 후에도 어느 해 자신이 수업시간에 했던 말, 즉 “그 여자가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면 안될까요?”를 마음 속에 온전하게 간직하고 있다. 학창시절의 어찌 보면 사소한 질문 하나가 화자를 평생 따라 다닌 것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화두가 되어버린 것이다.

   화자가 윤리 선생님의 질문을 떨쳐 버리는 순간은 그녀가 선생님의 질문 속으로, 세월을 껴안고 직접 뛰어 들었을 때 찾아온다. 화재가 실제 사건으로 벌어지지 않았을 뿐 모든 것이 동일한 상황이다. 화자는 그때서야 비로소 선생님의 질문이 세월로서만 답할 수 있었던 것임을 깨닫는다. 또한 선생님께서 그 질문을 왜 유독 가을에만 하셨는지도 알게 된다. 렘브란트의 그림 속에서 화자는 인간이 종국에 돌아갈 곳인 대지가 불타는 환영을 보며, 인생과 예술과 자연이 결코 구분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질문은 애초에 소년소녀들을 대상으로 한 질문이 아닌 것이다. 그들의 미래를 향한 질문이고, 살아보고 대답해야 하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이제 화자는 선생님의 질문에 진지하게 답변을 할 준비가 되었지만 그 답변을 경청해줄 선생님은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다. 그러나 화자는 슬퍼하지 않는다. 인생과 예술과 자연이 거의 하나라면, 나이로 사는 것만 사는 것은 아니다. 예술로 사는 삶, 예술이 되는 삶이 있는 것이다. 렘브란트의 그림 앞에 섰던 화자가 죽더라도 그의 시는 거장의 그림과 함께 살아남을 것이다. 「윤리학」은 린다 패스턴의 자전적인 시다.

 

 

  [작가소개]

 

▣ 린다 패스턴(Linda Pastan, 1932~ )

뉴욕 태생의 유태계 미국 시인. 래드클리프 대학과 브랜다이스 대학에서 수학했다. 겉보기에 평범한 삶을 일상적인 메타포에 바탕을 둔 절제되고 평이한 언어로 깊이 있게 그려내는 드문 능력을 소유한 작가다. 가정생활, 늙음, 죽음, 상실감, 인생의 덧없음 같은 것들이 그녀 시의 기조를 이루고 있으며, 종종 에밀리 디킨슨과 비교되고는 한다. 1950년경 촉망받는 작가로서의 길을 접고 아내와 어머니로 삶을 선택함으로써 잠시 대중의 기억에서 멀어진 적이 있다. 20년 남짓의 세월이 지난 후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시인의 역할과 통합하며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패스턴은 여전히 왕성한 시작(詩作)활동을 하고 있다.

 

 

▣ 백정국

고려대 영어교육과와 대학원에서 미국문학 석사.

University - Camden에서 영문학 석사.

University of California - Davis에서 셰익스피어

드라마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음.

현재 한성대 교수.

 

출처 : 우리시회(URISI)
글쓴이 : 연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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